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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과의 산책
이지민 외 지음 / 레디셋고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기묘하거나 슬픈 일은 어디서든 일어난다. 다만 알려지지 않을 뿐이고 그 주체가 내가 아닐 뿐이다. 내가 감당할 일이 아니기에 그저 함께 놀라고 아파하며 살아 간다. 그렇기 때문에 기이한 삶이 아닌 평범한 삶을 꿈꾸는 것이다. 그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여덟 조각의 삶이라 할 수 있는 『여신과의 산책』에서도 기이한 일은 벌어지고 여전하게 고통과 우울이 흐르고 삶과 죽음은 이어진다.
기이한 일부터 말하자면 이지민의 <여신과의 산책>이 그렇다. 소설의 주인공 ‘여신’에게 일어난 일로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들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러니까 여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모두 부모의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는 말이다. 우연의 일치지만 반복된 경험은 여신에게는 고통의 기억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간절하게 여신의 우연한 힘을 원하니 참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아이러니 한 것, 그게 삶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삶 속엔 죽음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말하는 한유주의 <나무 사이 그녀 눈동자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네>감각적이고 매혹적이다. 주인공은 암에 걸린 소설가다. 치료가 아닌 스스로 죽음을 실천하기 위해 이국의 나라에 도착한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어쩌면 삶의 마지막 풍경일지 모르는 그곳을 묘사한다.
‘폭이 좁은 2층 베란다에 젖은 빨래들이 널려 있다. 나는 잠시 빨랫감들이 마르기를 기다린다. 빨랫감들이 흔들린다.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5분이 지나기를 기다린다. 내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러므로 2층 베란다에 축 늘어져 있는 누군가의 빨랫감들은 나의 5분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그러나 그 5분 동안 빨래들은 전혀 마르지 않는다. 젖은 빨랫감들이 여전히 무겁게 늘어져 있다. 나는 다시 한 번 살의를 느낀다.’ p. 51
소설은 마치 죽음을 마중하러 가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삶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애착을 느낀다. 고요하고 담담한 글을 통해 드러내지 않은 고통이 요동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죽음을 동반한 삶을 써 내려간 문장은 때로 슬프고 때로 아름답다. 죽음을 염두하며 사는 삶은 없겠지만 한유주의 소설은 언제일지 모르는 그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이제 가장 현실적인 삶을 들려다 본 소설이다. 김이설의 <화석>과 박솔뫼의 <차가운 혀>는 전쟁같은 우리네 하루하루를 현실감이 있게 보여준다. <화석>은 유부녀인 주인공이 첫사랑을 만나면서 시작한다. 20대의 뜨거운 사랑이 아닌 불륜의 관계를 통해 정확한 현실을 인지하게 한다.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버거운지, 우리 시대에 집을 장만하고 아이를 키우는 일이 얼마나 고도니 일상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죽은 후 화석으로 남아서라도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이 해결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인정하는 허무한 삶 말이다.
‘나는 다시 파견 업체를 통해 마트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모카빵을 가위로 자르거나, 반찬 코너 시식대에서 주부들을 불러 모았다. 매일 다리가 퉁퉁 부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남편의 술자리는 줄어들지 않았지만 선배 사무실에서는 첫 월급을 받았다. 여름휴가 계획도 세웠다. 아이가 바라던 대로 바다에 가기로 했다. 아이에게 생애 첫 바다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게 참 기뻤다.’ p. 110
<화석>이 30~40 대의 모습을 다뤘다면 박솔뫼는 <차가운 혀>를 통해 청춘의 시간을 말한다. 경쟁이 가득한, 무언가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변화해야 한다고 소리치는 세상과 우울과 권태로 마주하는 화자의 하루는 쓸쓸하기만 하다.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나와 여자 친구와 사장의 관계를 통해 소통과 단절을 말한다. 나에게 시간을 활용하라고 말하는 사장은 어쩜 기성 세대를 대표하는지도 모른다. 소설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 달라고 말하는 누군가의 외침 같다.
‘여전히 나는 모든 게 같다고 생각해. 시간은 천천히 흐르지만 하는 일은 없다. 다른 사람들은 시간이 빠르다고 해. 그리고 그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한다. 언젠가부터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나는 내 시작이 그랬던 것 같다. 시간이 빨리 흐른 적이 없었다. 늘 하루가 길기만 하다. 태어날 때부터 지루하고 이미 늙은 사람 같다.’ p. 325
나머지 사랑과 이별로 아파하는 박주영의 <칼처럼 꽃처럼>, 인간의 의식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는 의미있는 메시지를 재치있게 그린 박상의 <매혹적인 쌍까풀이 생긴 식물인간>, 혼혈 여자친구와 방위병이 서로의 자아를 찾아가는 해이수의 <뒷모습에 아프다>, 가사의 미래에 닥친 대 한파로 동면하는 인간을 다룬 권하은의 <그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까지 다양한 삶이다.
어떤 삶은 상상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했고, 어떤 삶은 우리네 모습과 너무도 닮아 섬뜩했고, 어떤 삶은 한 번쯤 일어날 법한 일이라 놀라웠다. 조각 조각 이어진 삶 속 우연과 필연을 가만히 떠올린다. 때로 날카로운 통증처럼 때로 달콤한 사탕처럼 마주하게 될 우연과 필연이 계속 될 거란 사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