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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와 나 - 2012년 제3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ㅣ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영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2년 1월
평점 :
수많은 작가 지망생들은 년초 신춘문예 당선작 발표를 기다리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독자가 기다리는 건 누가 이상 문학상을 받느냐가 아닐까 싶다. 2012년에도 어김없이 이상 문학상 수상작이 결정되었고,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가 대상을 수상하였다. 어떤 문학상이든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건 대상작일 것이다. 나 역시 그러했다. 한데 언제부턴가 대상이 아닌 우수상에 더 관심이 간다. 한국문학의 미래를 짊어질 이들이 바로 그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란, 어쩌면 다음 수상 작가를 미리 만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올해 이상 문학상 작품집에서 먼저 읽은 소설은 조해진의 <유리>와 김숨의 <국수>였다. <유리>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오래전, 유리로만 이루어진 도시에서 산 적이 있다.’ p. 266 유리로만 이루어진 도시를 상상하자니, 눈의 여왕 같은 순정 만화가 떠올랐지만 소설에서 유리는 상처의 또 다른 말이었다.
조해진은 아주 작은 힘에도 쉽게 부서지고 깨져는 유리의 성질을 상처에 비유한다. 지방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주인공은 어린 시절 집단 폭행을 당한 상처를 안고 산다. 상처는 잠재의식 속에서 그녀를 짓누른다. 유리에 찔리고 밟혀 난 상처에서 스스로 벗어나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뒤엉킨 유리들 쪽으로 다가간다. 여자아이만이 그녀를 알아보고 그녀 쪽으로 손을 뻗으려 하고 있다.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세 명의 남자아이들이 뒤를 돌아본 순간,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벽돌을 내리친다. 영문도 모른 채 벽돌을 맞은 연약한 유리들은 신음 한번 제대로 내지르지 못하고 순식간에 깨진다. 부서진다. 가루가 된다. 이미 형체를 잃고 조각났는데도 단박에 사라지지 않고 질리게도 꿈틀거리는 파편들을 짓밟고 선 채 천천히 여자아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도망가서도, 포기해서도 안 된다.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벽돌을 휘둘러야만 이 장면 속의 여자아이는 완벽하게 망각될 수 있을 것이다.’ p. 290
과거 누군가에 손을 내밀었지만 아무도 그 손을 잡아주지 않았기에 그 폭력의 기억으로부터 자신을 구해낼 수 있는 이는 오직 그녀 자신 뿐이었던 것이다. 상처를 준 이도, 상처를 받은 그녀 자신도 모두 유리가 되어 처참하게 부서지고 가루가 되어 사라지기를 바라는 간절함에, 읽는 이도 어느덧 유리에 베인 통증을 느끼고 만다.
말기 암 진단을 받고 아무 것도 먹을 수 없는 계모가 있는 친정을 찾아 국수를 만든 딸의 이야기인 김숨의 <국수>는 밀가루로 국수를 만드는 아주 단순한 과정을 통해 새어머니에 대한 화해와 애정에 대해 말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는 맨 처음 밀가루로 국수 반죽을 하는 과정부터 국수를 삶아 낸 모습까지 나온다는 말이다. 어떤 한 과정도 건너 띄지 않고 모든 과정을 아주 섬세하게 다룬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계모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여자와 결혼 후 아이가 생기지 않아 오랜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낸 여자의 내밀한 감정들이 그 과정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차마 말하지 못한 말들이, 밀가루 덩어리에서 국수 가락이 되듯 조금씩 늘어난다.
‘반죽 덩어리가 웬만한 얼굴만 해서일까요. 국숫발을 뽑기 위한 반죽이 아니라, 그 어떤 형상을 빚기 위한 반죽만 같아요. 조몰락조몰락 아무 형상이라도. 반죽으로 그 어떤 형상을 빚는다면 당신의 얼굴이 아닐까요.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등 다양하고 상반되는 감정들이 뒤섞여 그 어떤 감정도 좀처럼 읽히지 않는 체념적이고 단순해진 얼굴…… 반죽을 그대로 놔두기만 해도 당신의 얼굴을 똑닮은 형상을 띨 것만 같아요. 그러니까 반죽이 저 스스로 조금씩, 조금씩 당신의 얼굴 형상을 띠어갈 것만 같아요.’ p. 245
차오르는 슬픔을 담담히, 쌓여 있던 아픔을 차분하게 풀어 놓는, 참으로 아름다운 소설이다. 이제, 수상작을 이야기할 시간이다. 자신을 옥수수라고 생각하는 소설가가 주인공인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는 무척 재미있다. 전처인 편집자, 미국에서 성공하여 출판사를 인수한 사장, 계약금만 받고 소설을 쓰지 못하는 주인공을 통해 소설가로서 갖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고충을 엿볼 수 있다. 동시에, 자본과 문학이 상충하는 시대에 대해 깊이 생각할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작가라고 자기가 쓴 책의 내용을 전부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독자 역시 잊어버리거나 엉뚱하게 기억한다. 따라서 작가와 독자가 만나서 책 이야기를 하다보면 언제나 다소 뜨악한 분위기로 흘러가게 된다.(중략) 이제 나는 그런 일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독자가 어떻게 기억하고 있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p. 27~28
조현의 <그 순간 너와 나는>, 최제훈의 <미루의 초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전개와 함께 몽환적인 분위기로 독특한 소설이다. 이국적인 느낌이 강한 함정임의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소외된 현대인의 고독한 자화상을 마주할 수 있는 김경욱의 <스프레이>와 하성란의 <오후,가로지르다>도 나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만나는 일은 즐겁다. 해서 2013년 이상 문학상 수상작은 누가 될지, 벌써부터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