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13
이정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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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느 날과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환기를 시키고, 메일을 확인하고, 다시 밥을 먹으려고 밥솥에 취사 버튼을 눌렀다. 읽고 있던 책이 있었지만, 그 책을 덮고 이정록의 시집 『의자』를 든 건 소란스러운 내 마음 때문이다. 수록된 시들을 소리 내어 읽었다. 세어보니 <어린 나무의 발등>부터 <풀뿌리의 힘>까지 모두 61편의 시였다. 알고 있었던 <의자>처럼 한결같이 따뜻한 시들이었다. 어디서나 마주할 수 있는 사물들이 시의 소재였다. 곧 우리의 삶을 시라는 이름으로 마주한 것이다.

 

 소란스러웠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모든 건 마음 먹기에 달려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마음 먹기가 참 쉽지 않다. 이런 시는 나를 웃겼다가 끝내 울리고 말았다. 어느 집 수저통에 한 벌쯤 있을 젓가락을 소개로 한 시다. 처음엔 똑같았을 젓가락들이 어느새 한 쪽만 닳아버렸다. 어머니와 주고 받는 농 비슷한 말들이 우스워서 웃다가 마지막 연에서 그 웃음이 울음으로 변해버렸다. 한 쪽만 닳아버린 젓가락이 집집마다 남겨진 수많은 어머니 같아서, 연인을 떠나버리고 홀로 남은 그 누군가 같아서 말이다.

 

 옻나무 젓가락

 

 십 년도 더 된 옻나무 젓가락

 짝짝이다. 이것저것 집어먹으며 한쪽만 몰래 자랐

나? 아니면

 한쪽만 허기의 어금니에 물어뜯겼나?

 

 어머니. 이 젓가락 본래부터 짝짝이였어요? 그럴

리가. 전 그럴 리가가 아니고 전주 이간데요. 저런 싸

가지를 봐. 같은 미루나무라도 짧은 쪽은 네 놈 혓바

닥처럼 물  질질 흐르는 데서 버르장머리 없이 크다가

물컹물컹 제 살 아무 데나 쓸어 박은 것이고, 안 닳은

쪽은 산 중턱 어디쯤에서 나마냥 조신하게 자란 게지.

출신이 모다 이 어미라도 동생들 봐라. 물컹거리는 녀

석 있나? 장남이라고 고깃국 먹여 키웠더니, 뭐? 그

럴 리가가 아니고  전주 이가라고? 배운 놈이 그걸 농

이라고 치냐? 젖은 혓바닥이라고.

 

 저녁밥 먹고

 어머니와 나란히 바깥마당으로 나오며

 짝짝이 젓가락처럼 발끝 머리끝을 맞춰보는데

 솥바닥을 뚫고 나가 불길이 되고 싶었나?

 서러워라, 어머니 쪽에서 불내가 솟구친다.

 숟가락 내동댕이치고 서둘러 떠난 식구들

 저 밤하늘 어디에서 늦은 저녁밥을 먹고 있나?

 녹슨 양철 지붕 위로 옻칠 부스러져 내린다. (p. 40~41)

 

 사는 건 참 별 게 아니라고 하는데, 누구나 같은 생을 산다고 알고 있는데, 사는 건 왜 이리 힘들까. 철물점에서 마주한 톱날에게서 투명한 물결을 본 시인은 이런 시로 삶을 위로한다. 하는 일이 맘에 들지 않는, 고난한 일상이 힘겨운 누군가에게 ‘누구나 톱날 하나쯤은 악다물고 살아간다고’ 말한다. 내가 가진 톱날은 과연 하나뿐일까. 그 톱날로 자르고 싶은 건 무엇일까. 내 마음 속 톱날이 무뎌지기를 바라야 할까, 더 강해지기를 바라야 할까.

 

 결

 

 철물점에 갔다가

 톱날 묶음을 보았다

 톱니들이 물결처럼 보였다. 손을 대면

 물방울이 튀어 오를 것 같았다

 하지만 톱날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누군들 자르는 일에 몸담고 싶으랴

 톱날을 어루만지며, 나는

 얼음집에 가면 톱으로 엉킨 물을 푼다고 말했다

 믹서의 톱날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그러자 이빨을 번뜩이며, 자기는 정말 파도를 닮아서

 크게 한 번 출렁이면 천 년 묵은 고목도 순간이라고

으스댔다

 누구나 톱날 하나쯤은 악다물고 살아간다고

 내가 아는 실패한 친구에 대해 말해주었다

 너는 토막 난 쇳조각에 불과할 뿐이라고

 녹슬 줄밖에 모르는 불쌍한 말년이 될 뿐이라고

 타일러 주었다. 일생 억눌려 사는 바위도

 결만 좋으면 구들장이 될 수 있다고 귀띔해주었다

 그러자 톱날에 껴 있던 파도 한 줄기가

 내 마음의 얼음장을 톱질하기 시작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물결 소리가 들려왔다

 시린 철새의 발가락도 보았다

 깃털 속으로 햇살 들이쳤다 (p. 56~57)

 

 겨울이니 <겨울밤>이란 시에 눈이 간다. 옥탑방에 살았던 기억 때문일까. 옥상에 보일러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추운 겨울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가족, 살 부비며 한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식구들이 모여 앉은 모습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각양각색 빨래집게처럼 저마다 색을 지닌 가족들. ‘내가 저 보석 지붕을 받들고 선 주춧돌이다’란 구절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든든한 남편, 좋은 아빠이고 싶은 사내의 마음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겨울밤

 

 보일러를 녹이려고 옥상에 오른다.

 

 하루 내내 이가 시리도록 일한 빨래집게들. 서걱거

리는 옷가지들을 다 건네주고 빨랫줄 한가운데에 모여

있다. 빨랫줄에도 아랫목이 있나? 오목하게 모두 모

여 찬바람을 비끼고 있다. 언 뼈를 부닥뜨리며 겨울밤

을 건너가고 있다.

 

 손전등을 밤하늘에 비춘다. 어리둥절 비틀거리던

기둥 하나가 허공에 선다. 그 불기둥을 따라 추운 별

들이 내려온다. 내가 저 보석 지붕을 받들고 선 주춧

돌이다. 별도 달도 다 따주겠다던 약속이 있었지, 한

사내가 쓴웃음으로 계단을 내려온다.

 

 아이 방 한가운데 작은 이불 속에도 빨래집게 같은

다리들이 아랫목을 만들고 있다.

 차갑지? 내 시린 무릎을 디민다.

 별꼴이야.

 별꼴이라고? 그렇지. 가족이 무릎을 맞대면 별꼴이

되지.

 

 그 누가 빨래집게들의 가슴마다 목걸이 하나씩을 채

워줬나? 깊은 밤  한 사내가 누군가의 목덜미를 쓰다

듬는다. 빨래집게는 그 팽팽한 철사 목걸이의 힘으로

이 악물고 일만 하나?

 끄응, 별꼴이 돌아눕는다.

 기름 떨어진 보일러처럼, 거칠게 바람이 빠진다. (p. 92~93)

 

 이 시집에는 유쾌하고 정겨운 시들이 많다. 그 유쾌함은 절대 가볍지 않고, 그 정겨움엔 많은 것들이 박혀 있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마음, 자연과 사물에 대한 애틋한 마음, 앞으로 살아갈 우리 생에 필요한 위로와 격려가 함께 있었다. 그래서 더 좋았고 그래서 더 따뜻했다.

 

 의자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p. 10~11)

 

 우리는 서로에게 고단한 삶은 쉴 수 있는 의자가 된다면 좋을 것이다.  의자가 된 풍경을 함께 바라본다면 더 좋을 것이다. 지금 나를 받히고 있는 의자에게 고맙다. 흔들리는 나를, 넘어지지 않게 잘 잡아준, 앉을 수 있는 ‘의자’란 이름의 당신에게 고맙다. 나도 당신에게 의자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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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2012-01-19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자, 시 좋네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겠어요.^^

자목련 2012-01-20 11:32   좋아요 0 | URL
진즉, 엄마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 게 아쉬워요..
참 따뜻한 시들이 많아서,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