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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
정용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1월
평점 :
어떤 문장은 마음을 환하게 밝혀준다. 어떤 문장은 지독한 슬픔을 감싸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글이란 건 참으로 위대한 것이다.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그가 마냥 부럽다. 그런 글을 읽을 수 있어 행복하다. 이제 나는 그를 더 많이 좋아할 것이다. 이제 나는 그의 글을 기다릴 것이다. 그는 바로 『가나』의 작가 정용준이다.
소설엔 슬픔과 절망이 가득하다. 어찌할 수 없는 절망과 함께 태어났거나 희망 보다는 절망만이 남은 삶이라 할 수 있다. 원망할 대상 조차 존재하지 않아 그들은 사라지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 죽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죽음은 그들을 원하는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만다. 9편의 소설은 하나같이 아프고 아름답다. 아파서 나도 아프고, 아름다워서 감탄한다.
표제작인 <가나>는 죽은 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그는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거대한 바다 한 가운데가 아니라 고국에 돌아가 벙어리 아내와 아들에게 사랑한다 말해줘야 했다. 그동안 말하지 못한 진심을 들려줘야 했다. 아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줘야 했다. 죽어서라도 그들에게 닿고 싶은 애절한 마음이 가슴 아픈 소설이다. 죽음을 묘사한 그의 문장은 고요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해류가 몸을 떠민다. 그것은 무겁고 밀도가 높은 바람과 같았다. 그 흐름에 따라 천천히 발이 움직이고, 난 바닷속을 산책하듯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지금 이곳을 어찌 형용할 수 있을까, 부드러운 흙 속에 심겨진 나무뿌리처럼 나는 바닷속에 잠겨 있다. 생각이 난다. 회전하는 스크루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때, 내 심장이 멈췄을 것이다. 오른쪽 허리가 심하게 손상되었다. 헤쳐진 살점과 내장들이 붉은 해초처럼 흔들린다. 갈치 두 마리가 내 곁에 맴돈다. 갈치가 움직일 때마다 칼날이 흔들리듯 날카로운 빛이 반짝거린다. 갈치가 내 몸을 먹는다. 너덜거리는 살점을 먹고 손상된 내장을 먹는다. 떠 있던 다리가 바닥에 닿는다. 바닥의 모래는 이제껏 밟아봤던 그 어떤 땅보다 부드러웠다. 바닷속에 숨겨진 땅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p. 62
전쟁이 일어난 일상을 담은 소설 <여기 아닌 어딘가로>에서도 그의 문장은 차분하다. 갑자기 닥친 상황에 도로는 막히고 광장엔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화자인 그는 어딘가로 도망치지 않는다. 아비규환인 세상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는 본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며 어딘가로 뿔뿔이 흩어지며 도망가고 있다.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자리에 주저앉아 손가락으로 계속 귓구멍을 쑤신다. 주황색 하늘은 여전히 맑게 개어 있다. 사람들이 곳곳에 누워있다. 아니 아무렇게나 널려 있다.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방향으로 관절이 꺾여 있거나 몸의 일부가 사라진 사람들도 많다. 땅바닥에는 누군가의 신체의 일부로 보이는 것들이 여기저기 쓰레기처럼 흩어져 있다. 강 건너편 빌딩이 느리게 붕괴되고 있다. 콘크리트가 모래산처럼 떨어져 나간다.’ p. 205~206
이런 소설도 있다. 행복이란 이름의 아버지와 장미와 왕자라는 이름을 지녔지만, 거대한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누나와 그를 돌보는 동생의 고통스러운 이야기 <굿나잇, 오블로>.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머리에 혹 같은 게 자라기 시작한 취업 준비생인 남자의 이야기인 <어느 날 갑자기 K에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임신을 했지만 아이를 지키려는 사라와 그의 가족의 갈등 속에서 태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랑해서 그랬습니다>는 독특하다.
정용준이 그려낸 인물은 죽음과 고통을 온 몸으로 견디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만하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이인 구름이만 남기고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며 횟집을 운영하는 남자 농과 출산 당시 죽은 아이를 가슴에 품고 사는 창녀의 이야기인 <구름동 수족관>, 어린 시절 선생님의 질책으로 인해 말을 더듬기 시작하여 결국 말을 삼켜버린 남자와 간질을 앓고 있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인 <떠떠떠, 떠>처럼 절망이 흐르지만 동시에 절망을 걷어낼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건 어쩌면 작가의 확고한 믿음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