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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미래
이광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0월
평점 :
‘사랑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을 마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 안에 사랑이라는 감정의 잔여물이 남아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한때 사랑으로 모든 게 용서가 되고 모든 게 아름답게 보였던 적이 있다. 어쩌면 그 시절 나도 모르는 사이 사랑의 미래를 보았다고 믿었던 건 아닐까. 잡히지 않는 그 시간을 흘려 보내고서야 사랑한다는 일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소모되는지 안다. 어쩌면 사랑 앞에 저어하는 이라면 그 과정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봄날의 벚꽃처럼 우리를 달뜨게 한다.
그러니 어찌 사랑을 저버릴 수 있으며 사랑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책은 사랑에 관한 시의 한 구절에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사랑이 그 다음의 시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시로 쓰여진 건 아니다. 하나의 시에서 떠오르는 장면을 상상하여 산문 형태로 담았다.
사랑에 관한 글이니 당연 ‘그’와 ‘그녀’가 등장한다. 사랑으로 불리는 거대한 우주 속에 나열된 모든 것들이 그와 그녀의 시간에서 조명되는 것이다. 사랑이 시작된 후 그 사랑이 얼마나 특별한가 증명하고 싶어한다. 왜 그(그녀)인지, 우연이 아닌 운명이라 믿는다. 먼 훗날 그 만남이 우연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서도 말이다.
세상에 같은 사람이 없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면서 뼈아픈 일이다. 같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은 영원히 가슴 아픈 착란의 상태에 머문다. 그가 누구와도 같지 않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거나, 혹은 똑같은 이유로 그를 결코 사랑할 수 없다. p. 33
사랑 안에 거할 때 모든 사물과 모든 감정은 언제나 깨어있기 마련이다. 해서 사랑이 흔들릴 때 사랑이 멀어질 때 그것들은 더이상 생물체가 아니게 된다. 의미를 부여했던 일들은 무의미한 존재로 남을 뿐이다. 서로에게 속했던 소소한 흔적들을 지우려 할지도 모른다. 그토록 사랑한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견디지 못한 채. 이런 문장들처럼 말이다.
사랑을 잃는 것은 ‘나’를 부르는 하나의 특별한 억양을 잃는 것. 그 억양이 존재했었다는 기억만, 어떤 습기가 있던 자리의 얼룩이 되는 것. p. 132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출생에 대해 그 사람보다 ‘내’가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p. 174
가만히 문장을 따라 읽는다. 몇 번이고 따라 읽는다. 어느새 그녀가 되어 내게 속했던 사랑을 꺼내본다. 잊고 있었다 믿었던, 결코 잊혀지지 않은 감정이 나를 흔든다. 사랑은 언제나 힘이 세 어떤 방패로도 막을 수 없는 건가 보다. 이런 게 이 책의 매력이다. 그와 그녀의 사랑으로 존재하던 게 나와 당신의 사랑이 되버린 것이다.
한 편의 잔잔한 영상을 마주한 기분이다. 그의 이야기에서 마주했던 일들이 그녀의 이야기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조명되는 과정은 흥미롭다. 특정 장소나 특정 사물을 기억하거나 잊으려 노력하는 모습에서 그와 그녀는 다르다. 그건 세상의 모든 그와 그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새겨 놓은 사랑이 또 다른 사랑으로 겹쳐질 때 사랑은 분명 한 층 더 커지고 단단해질 것이다.
41편의 시에서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누구나의 사랑처럼 설렘으로 가득했지만 때때로 무뎌짐의 반복으로 상처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꿈꾸고 사랑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건 통속적이고 식상한 사랑이 우리 생에 존재할 때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사랑의 미래를 꿈꾸고 논해야 하지 않을까.
‘사랑의 미래’를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지난 사랑을 매만지는 손길이며, 사랑이 사랑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며, 언제나 사랑 곁에 머물고 싶은 사랑이, 사랑의 미래라고. 그러므로 사랑의 중심이 아닌 바깥에 있다 해도 사랑에 발 담그고 있는 수많은 그와 그녀가 사랑의 미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