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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양장) - 조선의 문장가 이옥과 김려 이야기
설흔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평점 :
아름다운 문장을 발견했을 때 행복하다. 아름다운 문장이란 꾸밈이 가득한 문장이 아닌 본 대로 묘사하고 느낀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얼마나 세세히 진실되게 쓰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권여선의 『내 정원의 붉은 열매』를 읽었을 때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어디서든 서슴없이 권여선의 문장을 이야기한다. 그런 글 쓰기를 갈망한다. 언어가 가진 놀라움에 탄성을 자아낼 책을 또 만났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을 읽으면서 진정한 글쓰기가 어떤 것인가 생각한다. 이토록 고운 글이 있단 말인가. 이 책을 만난 건 정말 행운이다.
우선 이 책을 대해 말하기 전에 조선시대 뛰어난 문장가인 ‘이옥’과 ‘김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둘은 성균관 유생시절의 친구로 조선 정조의 ‘문체 반정’에 휘말린 인물이다. 책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그들의 우정과 진정한 글쓰기에 대해 말한다.
소설은 현감 김려 앞에 이옥의 아들이 찾아오는 일화로 시작한다. 그는 김려에게 아버지의 글을 남기고 나간다. 잊었다 믿었던 지난 시절을 떠올린다. 젊은 날 함께 글을 쓰고 논하던 벗과 어느 순간 거리를 두게 된 사건을 회상한다. 임금은 이옥의 글을 싫어했고 급기야 군역에 처한다. 그를 보고 김려는 두려움에 조금씩 멀리한다. 이옥과 함께 어울렸으므로 김려 역시 귀향을 떠나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간다.
시간이 흘러 이옥이 먼저 죽고 김려는 조정에 줄을 대어 시골 현감 자리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하여 이옥의 아들은 반가울 리가 없다. 그가 쓴 글을 읽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그 시절, 귀향길을 함께 떠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혹독했을 그의 생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현실에 안주하기 위해 자신은 숨겨야 했던 글을 이옥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옥의 글은 살아 숨쉬고 있었으니 변화였고 혁명이라 할 수 있었다. 이옥의 글을 읽는 동안 그의 환영과 가슴에 묻어두고 나누지 못했던 말과 글에 대해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눈다.
소와 송아지를 몰고 오는 자, 두 마리 소를 끌고 오는 자, 닭은 안고 오는 자, 문어를 끌고 오는 자, 돼지의 네 다리를 묶어서 메고 오는 자, 청어를 묶어서 오는 자, 청어를 엮어서 늘어뜨려 가져오는 자, (……)오른손으로 엿과 떡을 움켜쥐고 먹는 아이를 업고 오는 자, 병 주둥이를 묶어서 허리에 차고 오는 자, 물건을 짚으로 묶어서 가져오는 자, 버드나무 광주리를 짊어지고 오는 자, 소쿠리를 이고 오는 자, 표주박에 두부를 담아사 오는 자, 주발에 술이나 국을 담아서 조심스럽게 오는 자가 있다. p. 41~42
이옥이 쓴 글의 일부다. 문장을 읽음과 동시에 분주한 시장의 모습과 다양한 사람들의 표정을 바로 눈 앞에 마주한 듯하다. 시장을 묘사할 때 나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옥과 김려의 글은 분명 달랐다. 누구의 글이 더 멋지다 말할 수 없다.
연못에 붉게 핀 연꽃 천만 송이/연희 생각에 더욱 사랑스럽구나./마음도 같고 생각도 같고 사랑 또한 같았으니/한 줄기에 나란히 난 연꽃을 어찌 부러워했으랴./평생을 살면 즐거운 이가 원망스러운 이가 되고/좋은 인연이 나쁜 인연이 되는 건지./하늘 끝과 땅 끝이 산하에 막혀서/죽도록 부질없이 이별가만 불러 대네./전생의 죄과로 이생에서 이렇게 고생하는지/연희야, 연희야. 너를 어찌하랴. p. 157~158
김려의 글이다. 부령에서 정을 통한 기생에 대한 마음이다. 이옥의 환영과 마주하면서 그는 자신의 생에서 도려내고 싶었던 부령에서의 시간과 그곳에서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가 느껴지는 글이다. 책은 문체 반정보다는 그들에게 글이란 무엇이며 삶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에 대해 말한다. 이옥과 김려의 글을 통해 자기 자신이 온전하게 녹아든 글쓰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생각한다. 참된 글, 좋은 글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글로 표현해야 했던 그들의 삶, 글은 곧 그들 자신이었던 것이다. 절로 탄성이 나오는 멋진 글을 쓸 수 있는 이옥의 생이야말로 진정 멋진 삶이 아니었을까.
아침에도 멋지고 저녁에도 역시 멋지다. 날이 맑아도 멋지고 날이 흐려도 멋지다. 산도 멋지고 물도 멋지다. 단풍도 멋지고 바위도 멋지다. 멀리 조망하여도 멋지고 가까이 다가가 보아도 멋지다. 부처도 멋지고 스님도 멋지다. 비록 좋은 안주는 없어도 탁주라도 멋지다. 절대가인이 없더라도 초동의 노래만으로도 멋지다.(……) 어디를 가든 멋지지 않은 것이 없고, 어디를 함께하여도 멋지지 않은 것이 없다. 멋진 것이 이렇게도 많아라! 이 선생은 말한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이렇게 멋진 것이 없었다면 이렇게 와 보지도 않았을 게야.” p.197~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