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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라, 비둘기
김도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김도언은 ‘불안’, ‘권태’, ‘우울’이란 단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해 준 작가다. 『불안의 황홀』이라는 산문집은 말할 것도 없이 소설집 『랑의 사태』에선 (위협받는 포로처럼 우울해요. 눈에 에워싸인 당신의 복사뼈처럼 우울해요. 한쪽 발을 잃은 마네킹처럼 우울해요. p.118)처럼 황홀한 우울을 전염시킨다. 그는 우울과 권태란 단어가 가진 고귀한 진심을 들려준 것이다. 그러니 신작 『꺼져라, 비둘기』를 읽으면 살짝 당황한 건 당연하다. 그러나 당황함은 이내 기분 좋은 유쾌함으로 바뀌었다.
『꺼져라, 비둘기』란 제목에서 알 수 있는 소설에서 비둘기는 정말 꺼져버려 마땅한 존재다. 선악의 기원과 구조에 대한 사적 견해라는 부제를 통해 비둘기는 선보다는 악에 가깝다고 짐작할 수 있다. 소설은 작은 읍 토담리란 동네에서 비둘기로 인해 변화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반과 후반으로 나눠 두 명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전반의 화자는 이산으로 고교 씨름 선수였는데 시합 중 사고로 씨름을 그만두고 식당을 운영하는 부모님을 도와준다. 그는 사고 후 ‘서번트 증후군’을 앓게 된다. 후반의 화자는 시인 영만으로 그는 이산에게 멘토 같은 존재이다.
이산의 부모님은 토담집이라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교통사고로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토담집은 비둘기 해장국집으로 바뀐다. 토담리는 평범한 동네로 평화로운 곳이었다. 비둘기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느 날 갑자기 많은 비둘기가 등장하고 근처에 타이어 공장이 생기면서 외부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예전의 모습은 사라졌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크게 선과 악의 두 부류로 나눠진다. 비둘기로 인해 이익을 보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이다. 비둘기가 많아지면서 어디서나 비둘기 똥이 가득하다. 낮게 날아다니며 노약자를 위협하고 노점상인이 늘어 놓은 물건에 똥을 싼다. 하여 노인은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노점상은 사라졌다. 대신 목욕탕과 세탁소는 장사가 잘 되는 것이다. 여기에 오토바이 가게가 들어오면서 마을은 오토바이 천국이 되어 버렸다. 짐작했듯 오토바이 주인 역시 악의 집단에 속한다.
‘비둘기 추방을 위한 주민들의 모임’을 이끄는 한의사 고붕 내외와 시인인 그의 아들 영만과 세탁소, 목욕탕, 오토바이 가게를 제외한 꽃집이나 자전거 가제 주인은 선의 집단이다. 그렇다면 이산의 가족은 어떠할까? 이산과 친척 누나 실래는 약자이며 선이고, 경제권을 쥐고 이익만을 추구하며 아버지를 농락하는 새엄마와 실래를 괴롭히는 그의 아들 만세는 악이다. 2미터가 넘는 거대한 체격을 지닌 전직 씨름선수인 이산의 아버지는 모호한 상태라 할 수 있다.
등장인물은 그 자체로 소설의 중심이며 소설의 전부라 해도 좋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동과 사고나 선과 악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선은 악에 비해 대부분 늙고 약자이다. 작은 무리의 선은 악을 이겨낸다. 대표적으로 불량한 만세로부터 실래를 보호하는 영만이 그러하다.
특이한 점은 전반과 후반이 끝나며 등장하는 소설가이다. 소설가와 등장인물은 대화를 통해 자신의 역할이나 소설의 흐름에 대해 말한다. 『꺼져라, 비둘기』는 사건의 구성이나 발단 그 자체보다는 사람들의 행동이나 생각이 중요하게 다가온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입장은 모두 다르다. 이런 소설을 쓰게 된 소설가의 진심을 듣는 시간이라고 하면 적절할까.
‘소설 속에서는 시도 들어갈 수 있고 사진이나 악보도 들어갈 수 있는 거죠. 하지만 소설은 사진이나 그림이 들어간 시마저도 빨아들일 수 있어요. 더욱 놀라운 것은 소설이 빨아들이는 것들 중에는 유의미한 것만 있는 게 아니라 무의미한 것도 있다는 거예요.’ p. 135
소설 속에서 선은 악을 이긴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악을 이기는 게 선이며 결국엔 정의가 승리하는 세상이 올 꺼라 우리는 믿고 싶은 건 아닐까. 선과 악은 어떻게 존재하기 시작했으며 선은 정말 악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지녔는가 묻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아니, 소설이 우리 사회에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독자가 그 답을 해주길 기다리는 건 아닐까. 그가 말의 운명에 대해 쓴 글에서 말 대신 선과 악을 넣어 읽어 보았다. 선과 악은 사람의 마음에 의해 결정되는 거라 생각한다. 정의에 대한 부분도 그렇다.
‘어떤 말이든, 그것의 운명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의 태도나 그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 사이의 긴장에서 결정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p. 47
‘정의는, 말하자면 불가피한 일이기 때문이다. 악이 그런 것처럼 선도 지식의 종류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눈이 먼저 가서 상대의 눈과 높이를 맞추는 것이다. 그 높이는 측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느 순간 그냥 딱 들어맞는 것이다.’ p.248
선과 악이라는 커다란 주제를 놓고 보면 심오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지극히 맑고 순수하며 아름다운 소설이다. 바로 영만의 역할 때문이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며 나란히 길을 걸을 것이고,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 좋아하며 별을 함께 바라볼 것임,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며 함께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리고 우리 만의 길을 만들 것이다. 이 길의 초입에, 삶이 외롭고 고통스럽지만 그 삶을 비겁으로 내몰지 않는 바르고 착한 이들을 초대하기 위한 불을 켜둘 것이다.’ p. 196
소설에 흐르는 아름다운 글을 (시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과 사랑에 대한 시)읽는 건 정말 황홀하다. 작가 김도언은 시인을 통해 그의 바람을 표현한 것이다. 내게로 전해진 기분 좋은 즐거움을 많은 이가 느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