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천운영은 소설집 『그녀의 눈물사용법』을 통해 처음 만났다. 단편은 하나같이 강렬했다. 기쁨보다는 슬픔, 절망에 가까운 삶을 이겨내려는 강한 의지를 만날 수 있다. 뒤이어 『나는 가짜다』에서 만난 자화상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해서, 그녀의 소설에 대해 더 관심이 많아졌다.  하성란의 <책을 삼키는 TV>에 출연한 천운영은 장편 『생강』에 대해 고문 기술자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생강은 누구에게는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쓴맛을 누구에게는 아주 생소한 신맛을 안겨줄 것이다. 사건을 기억하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겐 어떤 맛으로 다가올까. 

 망설이지 마라. 돌이킬 수 없다. 놈을 사람이라 생각하지 마라. 놈은 돌멩이다. 나무다 풀이다 미친 당나귀다 개다 염소다. 저것은 그냥 돌멩이일 뿐이다. 돌멩이에서 눈물이 흐르게 해라. 통제력을 잃지 마라. 감정을 들키지 마라. 냉철해야 한다. 흥분하지 마라. 얼음 가면을 써라. 들끓는 피를 차갑게 식혀라. 숨소리조차 감추어라. 땀도 흘리지 마라. 신음소리도 내지 마라.’ p.10~11   

 가슴을 쓸어 내리는 두려움을 지닌 잔인한 문장이다. 그러나 너무 아름다운 문장이다. 단문이 지닌 매력이 이런 거구나 감탄한다. 천운영은 이렇게 나를 사로잡는다.  소설은 간결하면서 힘있는 문장과 빠른 전개로 진행된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과 맞닥뜨릴 공포는 이내 사라졌다. 천운영이 작정하게 쓴 게 분명하다. 잠시 숨 고를 틈도 없이 독자를 그녀가 이끄는 대로 빠져든다. 
 
 소설은 고문 기술자인 아버지와 대학 입학을 앞 둔 딸 ‘선’의 시선을 교차로 들려준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자부심을 가졌던 아버지, 그는 나라를 위해 일하는 애국자였다. 그가 마주한 사람들은 모두 범죄자였고 빨갱이였다. 그가 직접 사람을 죽인 게 아닌데 세상이 지목하는 살인자로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가족, 동료, 친구 할 것 없이 세상 어디에도 내 몸 하나 믿고 숨길 곳이 없었다. 쫓기던 그는 결국 딸의 다락방으로 숨어든다.  

 언제나 든든하고 자랑스러웠던 아빠가 잔인무도한 고문 기술자라였다니, 선이 알고 있던 진실과 세상의 이야기는 너무 달랐다. 사람들은 선을 고문기술자 딸로만 보려 한다. 경멸 가득한 차가운 시선이 선을 가둔다. 선을 알고 싶다. 과연 내 아버지의 실체가 무엇인지. 집과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들이 말을 믿을 수 없다. 진실은 누구에게서 들어야 하나. 그런 선에게 다가온 한 남자. 아버지에게 고문을 당한 남자,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살고 싶어서 거짓을 말한 남자가 선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없이 다정다감한 아빠가 악마였다니, 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선의 모든 보물과 비밀로 채워진 다락방에서 아빠가 산다. 그 아래에선 선이 그를 증오한다. 최소한의 물품도 제공하고 싶지 않다. 딸과 숨막히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니, 이제 더이상 아빠와 딸이 아니다. 서로를 죽이려 하는 적수일 뿐이다. 선은 그에게 추위와 공포를 견디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선은 그에게 고통을 가한다.

 저것은 내 아빠가 아니다. 저것은 짐승이다. 침을 질질 흘리며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성난 짐승이다. 아니다. 저것은 짐승이 잡아다놓은 썩은 고기다. 눈알이 빠지고 내장이 파헤쳐진 먹다 남긴 고깃덩어리. 아니다. 저것은 썩은 고기에 달려드는 파리떼다. 윙윙윙윙 더러운 날갯짓 소리가 들린다. 아니다. 저것은 파리가 까놓은 구더기다. 살을 뚫고 꾸물꾸물 기어나오는 징그러운 구더기다. 썩은 내가 난다.’ p.176~ 177 

 다락방이라는 제한된 공간과 아버지와 딸의 심리 대립이 탁월하다. 언제 충돌이 일어날까 긴장감은 점점 고조된다. 그러나 천운영은 오히려 감정과 감정이 부딪혀 폭발하게 두지 않는다. 각각의 내면 갈등을 그릴 뿐이다.  사실을 바탕으로 했기에 그럴까. 용서나 이해는 꺼내려 않고 흘러가게 둔다. 과연, 누구에게 용서를 구하고 누구를 이해할 것인가. 생강의 참 맛이 무엇이다 말해 줄 수 있는 이는 누구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