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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편견을 갖는 건 좋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하게 김훈의 소설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다. <내 젊은 날의 숲>에 대해서도 김훈의 자전적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다. 해서, 기자 시절의 김훈을 상상하기도 했다. 읽기 전에 짐작만으로 소설을 판단하는 건 소설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미친 건 소설을 다 읽은 후였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맑은 소설이다. 고요한 산사에 울리는 풍경의 울림이랄까. 내게는 그 소리로 들렸다. 그리하여 그 소리에 이끌려 숲으로 들어가 꽃과 나무들 간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게 한다. 김훈의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김훈의 소설을 권한다면 <남한산성>이나 <칼의 노래>가 아닌 이 소설을 권하고 싶다.
소설은 세밀화가인 연주의 시선으로 바라본 삶의 풍경이다. 연주 자신의 가족과 그녀 주변의 인물들을 그녀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묘사한다. 아버지를 경멸하면서도 놓지 못하는 어머니. 군청 공무원으로 평생을 살았지만 결국 뇌물죄와 공무원이란 위치를 이용해 가족을 부양한 아버지는 감옥에 있다. 비루하고 비루한 가장으로의 삶, 자랑스러운 아버지는 아니지만 연주는 지난한 그의 삶에 연민을 느낀다. 아버지를 감옥에 보내고 자유를 얻는 듯 보이는 어머니, 늙고 병든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생각한다.
‘마음의 일은 말하기 어렵다. 마음의 나라는 멀고 멀어서 자욱하다. 마음의 나라의 노을과 바람과 시간의 질감을 말하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아버지를 면회가면서 알았다.’ p. 11 연주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들은 모두 마음의 일을 말하지 못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민통선 안 국립수목원에서 일하게 된 연주는 달마다 대표하는 꽃과 나무를 세밀화로 그려 보존하는 일을 맡는다. 계절마다 변화하는 숲을 통해 연주는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민통선 안의 생활은 단절 아닌 단절의 생활이었다. 안과 밖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할까. 밖에서 보는 국립수목원과 민통선에 주둔한 군인들은 사무적이고 딱딱하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와 연주가 만난 김중위는 여리고 부드러운 청년이었고, 수목원의 연구실장 안요한은 쓸쓸하고 외로운 사람이었다.
이혼을 하고 세상과 소통을 두려워하는 아들 선우와 함께 사는 안요한을 통해 연주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선우와 나란히 식당에 앉아 아들의 밥에 반찬을 얻어주는 모습, 아버지와 꼭 닮은 아들의 모습을 보면 연주가 그랬듯 나도 세상 모든 아버지들, 자식을 위해 어떤 위험도 감수하는 사람들, 아버지의 삶이 가엾고 고단하게 느껴진다. 가석방 된 아내와 딸과 마주했을 때, 모든 아버지가 그렇듯 아버지는 꽃을 그리는 자식을 걱정한다.
연주가 그리는 숲은 김훈의 문장으로 피어났다. ‘5월의 숲은 강성했다. 숲의 어린 날들은 길지 않았다. 나무들은 바빠서 신록의 풋기를 빠르게 벗어났다. 잎이 우거지면 숲의 음영은 깊었다. 밝음과 어둠이 섞여서 푸른 그늘이 바람에 흔들렸고 나무들 사이로 맑은 시야가 열렸다. 빛과 그림자가 서로 스며서 그림자가 오히려 빛을 드러냈고 어둑한 시야 안에서 먼 나무와 풀 들의 모습이 가깝고 선명했다. 숲에서는, 빛이 허술한 자리에서 먼 쪽의 깊이가 들여다보였다.’ p. 143
5월의 숲을 상상한다. 5월은 방황하는 청춘을 닮았다. 바람이라는 시련과 고통이라는 그림자, 그 모두가 어우러져 하나의 숲이 탄생되는 듯하다. 문득, 나는 몇 월의 숲을 닮았으며 어느 계절을 지나고 있을까, 생각한다.
소설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잘 꿰어진 보석이다. 귀한 문장들, 자꾸 거내어 보고 싶다. 가령 이런 문장들, ‘꽃은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꽃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p. 164 ‘저절로 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일은 저절로 되어지지 않는다.’ p. 337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인다고 했던가. 봄을 시작으로 겨울까지 연주가 그려 낸 숲은 삶의 단면이었는지 모른다. 숲에 있을 때 숲의 존재를 모르듯 부재를 인식하고서야 존재를 확인한다. 풀과 꽃과 나무가 모여 이룬 숲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건 숲에서 나와야 가능하다. 이처럼 우리네 관계도 그러하다. 아버지란 존재의 부재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인식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나와 관계된 사람들과 어울려 있는 모습이 곧 아름다운 풍경임을 우리는 언제나 알게 될까.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는 그 감격적인 순간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