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해서 머나먼 - 2010 제1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372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창 친구들과 몰려 다니던 시절, 봄이 되면 봄앓이를 했다. 천지 사방으로 피어나는 꽃들과 연두빛 들판을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어른들 말씀이 그렇듯 생각해보면 그 때가 정말 빛나는 시절이었다. 요즘, 그러니까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는 부쩍 겨울이 되면 쓸쓸하고 허전하다. 다행인 건 일상을 나누는 친구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나만 느끼는 외로움이 아니라는 말이다.   


 시간은 늘 괴어 있다 

 수세기 저편에서  
 풀꽃 하나 흔들린다 

 하이덱거적 창문으로서의  
 한 Dasein도 흔들린다  

 흔들리고 흔들리는  
 이 세계 속에서 왜 시간은  
 늘 괴어 있는 것일까? 

 영원으로서 흔들리는 이 세계 안에서  

 흔적도 없이 괴어 있는 
 시간의 잿빛 그림자  - <시간의 잿빛 그림자> 전문 p. 43 

 
 잠들지 못하는 밤, 시를 읽었다. 이 계절과 잘 어울리는 제목의 시집이다.  한 해를 돌아보는 시간, 후회의 순간들이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여느 해보다 올해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환자복을 입고, 제법 환자다운 시간을 보낸 것이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병실에 침대를 마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방사선 치료를 위해 입원과 가퇴원을 반복하던 내 또래의 환자, 단순 종양제거 수술로 알고 열심히 운동을 하셨지만 위암이셨던 할머니 환자. 초췌하고 고통스런 표정의 내 모습이, 그곳에 고스란히 괴어 있다.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사막이 있었다 

 그 사막 한가운데서 나 혼자였었다 
 하늘 위로 바람이 불어가고  
 나는 배고팠고 슬펐다 

 어디선가 한 강물이 흘러갔고 
 (그러나 바다는 넘치지 않았고) 

 어디선가 한 하늘이 흘러갔고 
 (그러나 시간은 멈추지 않았고)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사막이 있었다  - <한 세월이 있었다> 전문 p. 62   

 
 시인에게 괴어 있는 시간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들은 늘 그렇게 괴어 있는 건 아닐까. 괴어 있는 시간들이 모여 한 세월을 만들고, 잡히지 않는 순간들은 또 어디론가 흘러가고. 그러다가 한 순간 마주하게 되는 세월들. 우리네 삶이 돌고 돌아가는 물레방아처럼, 지나온 고통과 슬픔은 사라진 게 아니라 잠시 흘러갔다가 다른 모양으로 내게 돌아오듯 말이다.  

 시를 통해 시인은 지난한 시간을 돌아본다. 그리고 이제는 그 시간을 정리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새롭게 변화하려는 시도, 그러나 불안감도 엿보인다. 확실하지 않은 것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그러하리라. 그래도 어떤 희망을 놓지 않으려 하는 의지, 내일을 향해 무조건 달려가느라 헤아리지 못한 것들을 떠올린다. 시인의 시가 도착할 그곳이 시인의 바람대로 어떤 풀밭이면 좋겠다. 어떤 풀밭엔 무엇이 자라고 있을까.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다 
 오랫동안 내 詩밭은 황폐했었다 
 너무 짙은 어둠, 너무 굳어버린 어둠 
 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 
 포오란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그러나 이사 갈 집이 
 어떤 집일런지는 나도 잘 모른다 
 너무 시장 거리도 아니고 
 너무 산기슭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예는, 다른, 다른, 다, 다른,   
 꽃밭이 아닌 어떤 풀밭으로 
 이사 가고 싶다  -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 전문  p. 50  

 작년 어느 날 
 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 
 내 나이가 56세라는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파서 
 그냥 병(病)과 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 
 그동안은 나는 늘 사십대였다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 <참 우습다>전문 p. 84  

 
<참 우습다>란 시를 읽으면서 거울을 들여다 본다. 주름과 기미가 가득하다. 평균적인 얼굴보다 나이들어 보이는 얼굴을 가졌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57세의 나이를 생각한다. 내 어머니는 갖지 못한 나이다. 아직은 멀게 느껴지는 나이, 그러나 언젠가 마주할 나이다. 마음은 언제나 청춘이라 했던가, 나도 피식 웃음이 난다. 꽃 피는 봄이 아니라, 추운 계절에 만났으니 다행일까.  그렇지도 모른다. 앙상한 나뭇가지로 잘 견디는 나무처럼 이 계절을 잘 견디기 위해 좋은 시들이다. 이 계절, 조금은 쓸쓸해도 괜찮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