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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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의 마지막 날이다. 더이상 여름은 없다. 두 번의 입원과 곤파스의 위력으로 끔찍했던 나의 여름날을 위로하고 싶었다. 살다보면 모든 게 다 괜찮다고 등을 두드려주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선택한 책이 박완서산문집이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견뎌내고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아픔까지 이겨낸 질곡의 세월을 살아낸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았다. 

 글은 소박하고 따뜻했다. 손녀들과 주말을 보내고, 귀한 손님이 오면 꼭 집 밥을 해주고 싶어하는 할머니, 자투리 시간에 영화를 관람하는 박완서의 일상은 평범했다. 지척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불타버린 남대문을 보며 애통해하고 월드컵 축구 경기에 열광한다.

 이른 새벽 홀로 정원에 나와 풀을 뽑는 할머니는 맨 손으로 흙을 주무른다.  마치 자연으로 돌아간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타샤의 정원을 연상시키며 그런 노년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이런 문장을 만났다.  뭔가 거대한 것으로 가슴을 맞는 듯 기분이다.

 내가 꿈꾸던 비단은 현재 내가 실제로 획득한 비단보다 못할 수도 있지만, 가본 길보다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내가 놓친 꿈에 비해 현실적으로 획득한 성공이 훨씬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 나는 누구인가? 잠 안 오는 밤, 문득 나를 남처럼 바라보며 물은 적이 있다.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영혼이다. 80을 코앞에 둔 늙은이이다. 그 두개 의 나를 합치니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푸른 영혼이, 80년 된 고옥에 들어앉아 조용히 붕괴의 날만 기다리는 형국이 된다. 다만 그 붕괴가 조용하고 완벽하기만을 빌 뿐이다. p 25~26 

 여든을 코앞에 둔 나이에, 던지는 질문 나는 누구인가를 겨우 절반의 시간을 살아온 내게도 던져본다. 유난히 끔찍한 기억으로 남을 올 여름을 보내고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해, 앞으로의 삶에 대해, 불안과 공포가 몰려왔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흔쾌히 답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사는 동안 고민하고 고민하면 답을 얻을 수 있을까. 모두가 마주해야 하는 붕괴의 날, 나 역시 조용하고 완벽한 붕괴가 되기를 감히 바란다.

 책에 대한 이야기도 많았다. 소개하는 책중에 내가 읽은 책도 몇 권 있어서 괜히 반가웠다. 거장이 소개하는 특별함 때문일까,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들은 꼭 읽어보고 싶었다. 특히,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김훈의 <남한산성>이 그러했다. <남한산성>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그 책을 읽지 못했다는 게 큰 잘못을 저지른 것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소소한 일상을 다룬 글과는 다르게 날선 차가움이 있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던 그 겨울과 1.4후퇴때의 모습을 겹쳐가며 써내려 간 피난 이야기는 내게도 차디찬 추위와 서러움을 안겨주었다.

 먼저 떠난 이들(김수환 추기경님, 박경리 작가님, 박수근 화백님)을 그리워하는 글은 가슴이 먹먹해진다. 다시는 볼 수 없는 그분들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특히 소설 <나목>의 주인공인 박수근 화백님과의 인연은 아련함이 가득했다. 박수근 화백을 다룬 방송을 통해 사연을 접해서 그런지 그 분을  생각하며 말씀하시던 박완서 작가의 모습이 함께 떠올랐다.

 문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꿈은 전쟁으로 인해 소설가의 길을 가게 했지만, 그것이 박완서 작가의 운명은 아니었을까. 누구나 선택하지 않은 삶에 대한 미련이 있을 것이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란 제목은 아련함과 동시에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강렬한 표지가 새롭게 보인다. 눈꽃이 내린 듯한 그림, 작가의 마당에 살구꽃이 이렇게 화사하지 않을까 싶다. 살구나무 아래에서 맨 손으로 흙을 만지는 작가의 일상이 오래 오래 지속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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