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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라쉬 브런치 - 번역하는 여자 윤미나의 동유럽 독서여행기
윤미나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3월
평점 :
아, 나른한 봄!
올해 봄은 봄인지, 겨울인지 분간할 수 없이 변덕스럽다. 그래도 봄인지라, 내내 게으름이 몰려오고, 종종 낮잠에 빠져들기도 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든다. 그러나, 행동으로 이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마음은 언제나 떠나기 위해 큰 가방을 준비하고 구식 핸드폰 충전기를 구겨넣고, 사진기를 챙기고, 좋아하는 시집과 소설을 넣고 집을 나선다.
굴라쉬 브런치. 윤미나, 그녀의 쫄깃쫄깃한 글을 읽으며, 나는 카프카와 흑맥주를 꿈꾼다. 높고 견고한 성으로 향하는 길에, 손에 든 흑맥주를 천천히 마시며 걷는 상상을 한다. 그 상상만으로도 행복을 안겨주는 책이다. 카프카의 단편을, 실비 제르맹과 슬라유보 지젝의 책을 읽어보리라 다짐한다. 프라하, 그 곳에 가고 싶은 욕망이 자라난다. 육개장을 먹을 때마다 비슷하다는 굴라쉬를 떠올릴게 분명하다.
생각해보면 산다는 게 허기를 채우는 것과 다를 게 뭐냐 싶다. 여행을 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관계를 맺는 것도 결국은 서로 다른 종류의 허기를 채우는 일이 아니겠는가. p 60
그녀의 말대로 서로 다른 종류의 허기를 이 책으로 채운다. 글맛이 대단하다고, 말한 누군가의 글에 나는 덧붙인다. 군더더기 없는, 과장이 없는 글이라고. 여행기가 아닌, 번역하는 여자 윤미나를 만날 수 있는 기분 좋은 글이라고. 그러니 만나보라고. 여행서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여행서이면서 영화와 책을 만날 수 있는 일석삼조의 책이다.
동유럽, 그 딱딱하고 낯선 느낌이 윤미나의 글로 부드럽고 친절하게 다가온다. 그녀만의 감각으로 영화와 책을 통해 이전에 만났던 체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에 대한 새로운 모습을 본다. 여행지에서의 하루 일과를 조목조목 섬세하게 써 내려간 글에 그녀의 불쾌했던 감정이, 떨리는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어디서 내릴지 모르는 트램을 타고, 블레드 섬을 향해 나룻배의 노를 젓는 엉뚱함이라니. 여느 여행서적에서 만나지 못한 색다른 느낌이라, 새롭다. 거대한 계획을 세우는 여행이 아니라, 포장하듯 화려한 사진을 내세운 책이 아니라, 그 일정이 더 미덥다. 당연히 갈 수 있을꺼라 믿었던, 꼭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가지 못한 당혹함을 현지의 가이드를 향한 불신도 귀엽다. 낯선 여행지에서 몰래 서리한 채소를 밥과 고추장으로 비벼 먹은 비빔밥의 맛은 어떠했을까, 군침이 돈다.
여행이란 게 원래 시시하다. 성당을 하나 더 보고, 바로크니 고딕이니 꽥꽥거리는 것이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물론 그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아는 만큼 더 보인다는 것은 명징한 진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냥 그 순간을 살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무지의 소치로 눈부신 건축과 역사를 상한 우유처럼 미련없이 포기해야 했지만,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오직 시간을 앞으로 밀어내기 위해 걷고 또 걸었던 그 시간도 좋았다. 어차피 여행은 각진 다면체 세상을 내맘에 맞게 이리저리 둥글리는 작업이 아닐까. p 86
실은 나는 그녀의 글에 매혹당했다. 어쩌면 이렇게 사랑스럽고 담백한 글을 쓸 수 있을까. 꾸미지 않은 듯 일상에서 묻어나는 적절한 묘사, 솔직 그 이상의 솔직함이 좋아서, 밑줄을 긋고, 반복해서 읽었다. <굴라쉬 브런치>에 대해 어떤 책이냐 묻지 말기를, 책을 열고 읽으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 느낌을 알게 될 터. 어쩌면 만기가 얼마 남지 않은 적금 통장을 중도해지 할 지도, 무작정 비행기표를 예매할지 모른다. 하다못해, 나처럼 카프카의 단편을 펼치고 흑맥주 대신 캔맥주를 집어들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