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부터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편혜영의 소설을 기다렸다. <아오이 가든>, <사육장 쪽으로 >에서 일상이라는 잔혹한 현실을 섬뜩하게 그려낸 편혜영. 이번엔 과연 얼마나 끔찍한, 혹은 잔인한 일상을  보여줄까. 눈, 코, 입, 귀, 정상적인 한 남자의 얼굴이 분명한데, 뭔가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표지는 소설에 대한 암시처럼 느껴진다. 
 
 소설은 한 남자의 이야기다. 제약회사 약품개발원으로 일하는 남자는 쥐를 잘 잡는 이유로 C국의 본사로 발령을 받는다. 전처와 이혼하고 무기력한 일상에서 탈피하고 싶었던 남자에게 파견근무는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C국의 상황이 어떻든 상관없이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이면 족했다. 막상 도착하니 C국은 전염병이 돌았고, 남자의 숙소가 있는 제 4구역은 쓰레기로 가득하다.  본사 직원 몰은 출근이 늦어진다는 말을 끝으로 연락을 끊는다.

 남자는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실에 외로움을 느끼며 전처와의 일상을 회상한다. 바쁘다는 이유로 함께 한 시간이 줄었다. 해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었다. 전염병으로 인해 제 4구역은 정기적인 소독과 식사가 제공된다. 몰과의 연락을 위해 본사와 회사에 전화를 걸지만, 아무 소식도 전해듣지 못한다.  외부와 어떤 접촉도 없이 지내던 남자는 모국에 남겨둔 개가 생각나 동창 유진에게 개를 부탁한다.

 유진은 남자의 출국 전날 잔인하게 죽은 개와 전처의 소식과 자신이 용의자란 사실을 전한다. 남자는 술에 취한 출국 전날을 떠올리지만, 전처와 개를 죽인 기억은 없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런 방문자에 불안해진 남자는 숙소에서 뛰어 내린다. 노숙자가 된 남자는 공원을 거쳐 하수도에서 생활하며 시궁창의 쥐를 잡는다. 방역팀장에 의해 임시방역원으로 선발된 그는 쥐를 잡으며 살아간다.

 남자는 여전하게 몰을 찾는다. 힘겹게 본사에 방문했으나 전영병에 걸려 퇴출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몰은 과연 존재하는 인물일까. 쥐를 죽이는 일은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전염병이 사라진 C국에서 남자는 쥐를 잡아 돈을 벌며 살아간다. 안정적으로 보이는 삶은 고독함과 외로움이 함께였다. 모국에 전화를 걸어 유진을 찾거나, 전처와 같은 이름을 찾지만 언제나 실패했다. 

 누가 전처를 살해했을까. 소설은 강한 의문을 제시할 뿐 답은 알려주지 않는다.  제약회사 약품개발원인 주인공이 전염병이 도는 나라에게 결국 쥐를 잡으며 살게 되는 이야기. 살아있는 쥐를 죽이는 끔찍함이나 전염병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사회의 묘사는 전작과 다름없이 그로테스크하나 훨씬 더 꼼꼼하다. 그 기막힌 전개과정을 보면 편혜영이 무척 공들여 썼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의 인물들은 유진을 제외하고 이름이 없다. 주인공 ‘남자’를 시작으로 ‘전처, C국, 제 4구역, 모든 외국인으로 대표되는 , 심지어 이름없는 까지. 익명성으로 부여된 인물은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누구라도 예외없이 전염될 수 있는 전염병도 그러하다. 특정한 인물이 아니라, 모두에게 닥칠 수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는다.

 좁은 사각형의 유리상자 안에서 그는 공연히 떠오르는 이름들을, 전처의 이름이나 유진의 이름 혹은 자신의 이름을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동전을 넣지 않으면 어떠한 신호음도 떨어지지 않는 수화기는 묵묵히 그가 부르는 이름을 들어주었다.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유리상자 안에서 가볍게 공명했다. 그 이름들은 닿을 수 없는 먼 과거와 유일하게 이어진 것이었다. p 234  

 남자의 삶은 기구한 운명이라 해야 할까. 전처나 직장 동료와 대화를 회피하고 살아온 시간과 명확한 의사 전달을 뒤로 하고 결과를 예측해 결국 고립되고 만다. 따지고 보면, 모두 소통의 부재에서 기인한 것이다. 공중전화를 볼 때마다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누군가와 말을 나누고 싶은 남자의 간절함은 고독을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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