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합
한창훈 지음 / 한겨레출판 / 199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한창훈의 소설은 묘한 중독성이 있다.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가 깔아 놓은 놀이판에 슬그머니 자리를 잡는 것이라고 할까. 그는 취임새를 넣어가며 목청 높여 흥을 돋우는 놀이패의 우두머리이며 독자는 박수로 화답하는 관객이 된다. 그리하여 너도 나도 즐거운 놀이판. <나는 여기가 좋다> 이후 두 번째 만나는 소설 <홍합>도 그랬다.  걸죽한 사투리를 흉내내며 읽었다. 한창훈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듣기 민망한 정도의 음담패설조차도 정겹게 들리는게 사투리의 매력을 글에 잘 녹아들게 하는 힘을 가졌다.
 
 소설은 전라도 여수의 홍합 가공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담았다. 공장에서 일을 하는 대부분은 중년 여자들로 남편이 있든 없든 부업 형태인 공장일이 유일한 생계수단이 된 사람들이다. 배를 타다가 사라졌거나 술 없이 하루도 못 살거나 폭력이 일상이 된 사람. 하나 같이 제대로 된 남편을 둔 여자가 없었다. 반장일을 맡고 있는 강미네는 남편의 폭력에 이혼을 하고,  중풍걸린 시할머니 시부모와 두 딸의 엄마로 한 집 안의 가장이 된 승희네는 공장의 문기사에게 정을 준다. 부모 잃은 아이를 하나 키우며 시어머니와 공장에 나오는 미순은 5.18에 남편을 잃었다. 모두가 하나 같이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부스스한 퍼머머리, 하루 하루 일당을 계산하며 아이들 입성을 댈 생각에 뿌듯해하기도 하며 제발 술 좀 그만 마시라고 잔소리하는 모습. 지지고 볶으면서도  때가 되면 자식들 밥 챙기러 발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에서 우리의 어머니를 본다. 가슴 속 한을 수다로 풀어내며 위로 받고 때로는 모진 말로 싸움이 일기도 하며 무거운 어깨 기대고 싶은 로맨스가 피어나기도 하는 공장은 그들에게 유일한 도피처 였는지도 모른다. 계절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바다의 풍경과 중년 여인네들의 푸념과 회한이 이어진다.  어느 누구를 주인공이라 지정할 수 없는 모두가 주인공이다.
 
 <어떻게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삶의 연속일 뿐이었으나, 언어로 옷을 씌우면 또 객기나, 일탈이나, 퇴화나, 자포자기의 명찰을 달 수도 있거니와 또 다른 가지의  색채를 씌우면 성숙이라거나, 배짱이라거나, 진화거나 뭐 그런 형태일 수도 있었다.> p 211
 
 떠나고 싶은 마음 누군들 없겠는가. 고향이라는 이유로, 밥 벌이라는 이유로 살아가는 것일터. 가족이 있기에 속내를 털어 놓은 이웃이 있기에 모두가 그렇듯, 그 안에서 게걸스럽게 웃고 울며 사는 것이다. 반복되는 작업을 마치고 마시는 막걸리 한 잔으로 고단한 삶을 달래는 일상을 아름답게 신명나게 그려내는 것은 한창훈이기에 가능하다. 그의 글에는 그를 만나고 싶에 하는 무언가가 있다. 
  
 <아름다운 것은 스스로 서 있는 자리에게 가능할 것이었다. 돌아볼 것도 없고 쫓아갈 것도 없었다. 언제나 눈앞에 있었다. > p285
 
 언제나 눈앞에 있었는데 아직 알지 못했던 아름다운 것들은 무엇일까. 바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 내 곁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바로 나 자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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