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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자오선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인간의 역사에 있어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들의 욕망은 전쟁을 불러온다. 그리하여, 인류는 잔혹한 죽음을 역사에 기록한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의 소리를 통해 새로운 역사로 이어지고, 토론의 대상이 된다. 인간으로써는 차마 행할 수 없는 처참한 살인 기록들을 마주하며 과연 그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게 믿기지 않지만 그건 사실이다.
잔인함이 자리잡은 인간의 내면, 그 살벌한 현장에 작가 코맥 매카시는 소년을 등장시킨다. 그에게 있어 소년은 <로드>에서 만난 아들과 같다. 냉랭한 눈빛, 세상에 대한 적대감이 가득한 소년, 코맥 매카시는 여전하게 불친절하기만 하다. 역사적 기록, 전쟁을 재구성한 소설이지만, 그 시절 그 무리에 분명 열네 살, 아니 더 어린 소년은 존재했을 것이다. 소년과 감옥에서 만난 토드빈, 전직 신부라는 이유로 선의 표상으로 보여지는 토빈, 살벌한 눈빛이 그려지는 인간 사냥군 글랜턴, 궤변을 늘어놓는 판사등 구체적 인물을 제시하지만 소년에게는 어떠한 이름으로도 불려지지 않는다. 어쩌면 소년이라는 단어가 그 이유를 대신할지 모른다. 아이, 소년, 그들은 세상과 세상을 이어 줄 끈이 아니던가.
1842년 미국과 멕시코의 전쟁은 끝이 났지만, 기록과 실제는 언제나 다르다. 멕시코와 미국은 새로운 전쟁에 돌입한 것이다. 모래 바람이 가득한 사막, 가물거리는 오아시스, 마른 선인장, 그리고 경계심이 가득한 사람들의 건조한 눈빛만이 소설을 진행시킨다. 이처럼 건조하고 메마른 세상을 서정성 짙은 문장으로 승화시킨 코맥 매카시, 아마도 이런 이유로 그의 소설을 극찬하는 것이리라.
살인과 약탈, 방화는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피로 물들인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다. 낭자한 피는 그저 결과일 뿐이며, 살아있으니 또 다시 걷을 뿐이다. 군대는 흩어졌다, 다시 모이기를 반복한다. 새로운 사람들이 영입되거나 한꺼번에 소멸된다. 소년은 혼자가 되었다가 어디선가 스친 그들과 재회를 한다. 그들이 죽여야 할 사람들은 아파치였으나, 끔찍하고 잔인한 욕망은 인디언과 주민들에게로 향한다.
걷고 걷는다. 적과 아군의 차이는 없다. 그저 나만이 아군일 뿐이다. 그들이 맞는 새벽, 새로운 빛은 말 그대로 핏빛이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사의 결정은 정의에 관한 모든 질문을 무력화하네. 하느님의 거대한 선택에는 도덕적이고 영정이고 자연적인 모든 사소한 것들이 다 포함되네. 325족)전쟁이라는 상황은 살인에 대해 한없이 너그럽다. 그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진행시키는 살벌함, 그것이 인간의 본질인가. 선과 악, 정의는 사라지고 오직 죽음만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인가. 말이 없는 소년은 목격자이며 관찰자,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말을 하는 판사는 마치 하느님의 대변자처럼 느껴진다.
(전쟁의 피에 자기 자신을 오롯이 바친 사람만이, 저 밑바락으로 내려가 생생한 공포를 맛보고 급기야 참된 영혼으로 공포와 이야기 나누는 법을 배운 자만이 진정한 춤을 출 수 있네. 427쪽)문득,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한다. 성악설(性惡說), 성선설(性善說)로 대두되는 인간의 본질, 과연 그 본질은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 독자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난해한 문학을 이해하고자 욕심을 부릴 것도 아니요, 추악하고 살벌한 인간에 대해 논할 것도 아니다. 다만, 작가가 그려내는 아비규환의 현장에 언제나 소년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