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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일기
이승우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평점 :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적절한 때, 정확한 입장을 밝히지 못하면 의도하지 않은 상황으로 흘러가고 만다. 그 후로 많은 불편함으로 지속된다. 그러나 삶에 있어서 타이밍을 맞춘다는 것은 맘 먹기에 따른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 때로 평생을 묻어둔 그 타이밍을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기억해 내곤 한다. 그 때,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그랬어야 했는데. 후회 아닌 후회는 비밀인 양, 숨겨둔 일기장에 기록되고 만다.
이승우의 『오래된 일기』속 단편들은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못하고 자신의 일기장의 기록한 간질 간질한 불편함들이다. 가려운 곳은 긁어주어야 한다. 바로 긁어주지 못하면 부스럼이 되고,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소설들은 지워버렸다고, 잊어버렸다고 치부했던 불편함들이 사실은 마음 한 구석에서 부유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한다. 소설 속 화자들은 주도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다. 결코 소설가가 될 꺼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소설가가 되고 싶어했던 사촌 대신 소설가가 된 나의 오래된 일기장을 가직한 ‘오래된 일기’, ‘무슨 일이든, 아무 일도’ 속 나는 아버지의 재혼으로 정신적 질환을 앓고, 가족들에게 철처하게 무시당하는 동생 상규를 돌본다. 아니, 사실은 그를 떠나보내고 싶어한다. 집안의 십자가라고 말하면서도 그 십자가를 돌보지 않은 가족들.
‘타인의 집’ 과 ‘방’ 을 통해 공간이 주는 위안을 말한다. 사소함으로 시작된 부부싸움은 끝내 별거가 되고, 나는 집에서 쫓겨난다. 삶에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집이라는 공간은 방으로 이어진다. 사실, 우리는 집보다는 나만의 방을 원하고 있지 않은가. 우연이지만, 옛 애인의 집에 머물게 된 타인의 집 화자는 그 공간 자체에 위안을 받는다. 같으면서도 다른 그 공간에서 누군가는 생을 마감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도 한다. 자신을 돌봐주었던 치매 걸린 큰어머니의 등장으로 가족을 헤체된다. 아내와 아이는 미국으로 떠나버리고 큰어머니는 죽고 만다. 이혼을 종용하는 아내, 그는 집을 팔고 자신만의 방을 찾아 헤맨다. 과거의 따뜻했던 공간, 모든 것은 사라지고 나서야 그 존재감의 실체를 느낀다. 언제 떠나야 할 지 모르는 방, 그 안에 나는 새로운 존재를 각인시킨다.
추억이 아닌, 과거의 기억들이 소설을 통해 드러난다. 3년 전 헤어진 여자로의 전화는 지난 과거는 현재로 흡입된다. ‘정남진행’, ‘풍장- 정남긴행2’는 그 과거로의 여행이다. 광화문에서 정남쪽에 위치한 정남진이라는 곳은 과거의 이야기의 시작점이며 귀착점이다. 그 여로를 동행하며 독자는 그들의 과거를 떠올린다. 내게 있어 그곳은 어디인가. 고향, 사랑이 머물렀던 곳, 기억이란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인 우리들의 정남진은 어디인가.
담아둔 말은 그 시간이 오래되면 진정성이 사라질지 모른다. 누군가에 의해 말해지지 않으면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길고 어둡고 놀랍고 뜨거운 이야기들이 우리의 삶의 지표면 아래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돼. 128쪽 현 시대에 부활한 과거의 이야기꾼 전기수라는 직업을 통해 나는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하는게 아니라 말을 나누고 싶어한다. 말을 통해, 당신을 알고 나를 보이고 그렇게 살아야 함을 알면서도 입을 열지 못한다. 현대인의 고독감, 온전하게 나를 드러내고 싶은 말들, 일기장에 담아두지 않아야 한다. 일기장이라는 말은 비밀스럽다. 작가 이승우가 오랫동안 담아둔 마음의 고백 아닌 고백은 다소 어려웠고 먼 메아리로 남는다.
“자신의 생명을 조금씩 떼어내서 하루씩 삶을 연명하는 거랍니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삶을 내놓아야 하는 거지요. 그것이 인생이예요.”91쪽
하루를 살기 위해 우리는 딱 하루만큼의 삶을 내어 놓을 수 있는 걸까. 내일을 만나기 전에, 지난간 오늘을 기록한다. 주저함과 머뭇거림을 쌓아둔 일기장, 그 일기장 속에 회환과 슬픔도 있을 터, 그러나 그 기록들은 나에 속한 것들. 또 다른 일기장을 펼친다. 이제 나는 어떤 말들을 비밀스런 이곳에 쓰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