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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를 만나러 가다
김경욱 / 문학동네 / 1999년 1월
평점 :
품절
인상깊었던 드라마를 시청하게 되면 누구의 극본인지 끝까지 자막을 기다리는 습관이 있다. 그 자막을 통해 기억하고 있었던 작가가 김경욱이다. 드라마가 아닌 책을 통해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장국영이 죽었다고?> 동명 소설을 드라마로 만난 느낌 때문인지 그의 소설은 마치 치밀하게 계산되어 연출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20세기를 마감하는 시간적 배경탓인지 지워버리고 싶은 암울한 기억들, 새로운 시대로의 불안과 낯섬이 함께한다.
사실상, 세기가 바뀜은 별반 큰 사건은 아니다. 또 다른 오늘, 달라지고자 염원하는 이는 세상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작가 김경욱은 방황하는 젊은 세대들,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그들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관찰한다. 소통하고자 하는 그들,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의 세상으로 교류를 꿈꾼다.
그토록 갈망하는 <베티를 만나러 가다>속 베티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다. 베티는 <변기 위의 돌고래> 희미한 일상에서 잃어버린 열정을 찾고 싶은 사람이 찾는 돌고래와 같다. 허락되지 않은 사랑, 그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의 영혼까지 내던지는 연인들의 모습을 그린 <아르헨티나의 연인들>. 아르헨티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과 먼 거리의 곳, <블랙 러시안>이나 <화성의 역습>에서 등장하는 화성이라는 이상적 공간이다.
지금 이곳에서 존재하는 나를 잊고 싶은, 21세기에는 지구가 아닌 낯선 세계로 빠져 들고 싶은 욕망은 그가 심어놓은 <너바나>, <라디오 헤드>, <스팅>, <U2> 의 노래를 통해 흐른다. 또한 곳곳에서 그가 사랑하는 영화들이 등장한다. 그리하여 독자는 그의 글을 통해 만난 영화와 음악으로의 관계를 맺는다. <아비정전>, <그랑블루>, 김경욱의 글은 부드러운 짜릿함과 황홀감, 무척 감각적이다. 시간을 거슬러 흥분과 열정으로 가득찼던 1999년을 생각해 본다. 모두가 꿈꾸던 21세기, 한 순간 터져오르는 불꽃놀이처럼 맞이하고 싶은 21세기였것만. 21세기에 살고 있는 내가 만난 20세기는 아련한 그리움이다.
<삶이란 본질적으로 하나의 유혹이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여전하게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를 유혹한다. 1999년 이 책을 만났다면 나 역시도 소설속 화자들처럼 화성이상의 그 어떤 곳으로 떠나고 싶고 나만의 베티를 만나고 싶은 유혹을 온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들보다 더 치열하게 사랑하고 더 열심으로 나를 찾아 헤매였을지 모른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참으로 유혹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