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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 2003년 제3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동기중 고향이 김천인 녀석이 있다. 녀석과 연락이 닿으면 작가 김연수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생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그러나 때로 진실은 바람빠진 풍선같은 것이라는 아직은 그가 쓴 글을 통해 그를 상상한다. 아직 나는 그를 ’열렬하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열렬하게’로 향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의 작품 목록을 보니 등단 이후 많다 싶은 책들을 냈다. 겨우 소설 한 권, 산문 한 권을 만났지만, 유독 자신의 시대와 자신의 영역을 드러내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그가 태어난 70년대, 그가 살았던 김천, 그가 믿고 있는 세상을 고집스러게 강조한다고 할까. 특히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라는 이 소설집은 온통 그 시대, 그 공간의 이야기임에도 이상하게 그 고집이 괜스레 반가웠다.
김천역 파출소 옆 <뉴욕제과점>을 그려본다. 역전을 지나 어딘지 알 수 없는 평화시장, 골목에 서 있다. 그가 살아온 김천은 내게 대전이라는 도시를 떠올린다. 역을 끼고 가득 늘어선 난전, 시장통을 지나 즐겨갔던 극장, 촌스러운 나의 학창시절, 나만의 꿈을 꾸고 짝사랑하다 치져 울기를 반복하던 그 때의 나, 풍물패 동아리에서 집회를 주도하던 선배의 낯선 모습, 공중전화 작은 공간에서 전화선을 타고 나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힘을 얻던 순수하고 순진했던 나를 만난다.
이상한 일이다. 제과점 돈을 가지고 도망간 게이코를 찾아 떠나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불편한 여정을 그린 <하늘의 끝, 땅의 귀퉁이>를 시작으로 단편들은 마치 기억 저 너머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떠나는 여행처럼 느껴진다. 70~80년대 나무책상, 나무의자에 앉아 무조건 선생님의 말이라면 순종, 아니 복종까지 해야하는 줄 알았던 학창시절이 사진첩처럼 펼쳐진다. 드닷없는 선생님의 전출, 어른들의 세계는 모두 정의로운 세상이라 믿었던 우리들의 모습. 이제 나는 어른이 되었지만 아이였을 때의 내가 상상했던 어른이 아니며 정의로운 세상에 살고 있지도 않다.
우리가 지나온 시대, 내가 알지 못하는 무서운 일들이 일어났던 시대를 그는 80년대 광주를 연상시키는 슬픔을 단편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속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이사온 은재네 집을 통해 상처를 달래주고 싶은 바람을 보여준다. 골목을 공유하고 마당을 공유하고 심지어 안 방을 공유하며 살았던 이웃들, 친구들, 그 시절의 모습은 <똥개는 안 올지도 모른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곳곳에 드러나는 묘사나 시대적 배경을 통해 애잔한 그리움을 몰고온다.
여린 소년에서 어른이 되면 눈물을 그쳐야 할까. 단편<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 말고>는 비장한 결심이 느껴진다. 그 소년은 지금 단단한 어른이 되었을까. 아니, 가끔은 눈물짓고 가끔은 쉬고 싶은 30대의 가장이 되었을지 모른다. 9편의 단편 중 나를 울리는 단편이 있었다. 모든 소설이 자전적인 소설이지만 특히나 <뉴욕제과점>은 30대를 넘어 40대를 향하는 지금의 나로 살기까지 지나온 과거의 나를 생각하게 한다. 과거에 존재했으나 지금은 부재의 존재가 된 내 어머니.
내가 자라는 만큼 이 세상 어딘가에는 허물어지는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게 바로 인생의 본뜻이었다. 아이가 자라나 어른이 되는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 사이에 아무리 단단한 것이라도, 제아무리 견고한 것이거나 무거운 것이라도 모두 부서지거나 녹아내리거나 혹은 산산이 흩어진다. 밀려드는 파도에 모래톱이 쓸려나가듯이 자잘한 빛들이 마지막으로 반짝이면서 어둠 속으로 영영 사라졌다, 내가 태어나 어른이 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말이다. <뉴욕제과점 본문 75쪽>
서른이 넘어가면 누구나 그때까지도 자기 안에 남은 불빛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 들여다보게 마련이고 어디서 그런 불빛이 자기 안으로 들어오게 됐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한때나마 자신을 밝혀줬던 그 불빛이 과연 무엇으로 이뤄졌는지 알아야만 한다. 한때나마. 한때 반짝였다가 기레빠시마냥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게 된 불빛이나마. 이제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불빛이나마. <뉴욕제과점 본문 79~80쪽>
내가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잃어버린 것들은 무엇일까. 나를 지탱했던 불빛은 무엇일까.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 나를 지탱해 줄 불빛을 찾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는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허구를 구성하는 것은 경험이며 그 경험을 공유했다면 소설은 허구가 아닌 진실이 될수 있다.<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를 통해서 김연수는 내게 그의 추억을 나눠줌과 동시에 잠자고 있던 내 어린시절을 흔들어 깨운다. 그의 신작인 <밤은 노래한다>대신 이 책을 먼저 읽은 것은 참 잘 한 일이다. 이제 그가 들려줄 노래를 들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