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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그런 책이 있다. 모두들 감동적이라고 극찬하는데 내게는 좀 어지러운 느낌을 주는 책. 왠지 나만 남들이 느낀 그것을 찾아내지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책, 이 책이 그러했다. 어린 아들과 아버지가 떠나는 머나먼 여정. 그들이 어디를 향하는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왜 그 험한 여정을 가고 있는지 알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요란한 문구는 책을 선택하는데 어떤 영향을 줄까? 미국 현지에서 유명세를 탄 책. 낯선 작가, 사실 외국 작가에 익숙치 않다. 코맥 매카시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작가라는 것뿐.
시작은 음울했다. 그 시작은 끝내 음울을 버리지 못했다. 글씨를 채 배우지 못한 어린 아들, 세상의 모든 것에서부터 아들을 지켜야 했던 아버지. 아들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과는 다르게 아버지의 메마르고 냉소적으로 느껴졌다. 결국 세상에 혼자 남아야 할 아들을 연습시키기 위한 것이었을까. 그런 아버지에게 무조건적인 믿음과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던 아들은 이렇게 묻는다.
제가 죽으면 어떡하실거예요?
네가 죽으면 나도 죽고 싶어.
나하고 함께 있고 싶어서요?
응, 너하고 함께 하고 싶어서.
알았어요. 본문 16쪽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얼마나 확인하고 싶었을까. 상상하고 싶지 않다. 아이에게 남자는 절대적인 그것이었다. 모든 문명은 사라지고 세상은 두려움과 정적뿐이다. 여기 저기 흩어진 죽음의 잔해, 그들을 죽이려 달려드는 사람들, 내가 살아야 하기에 결국은 누군가를 죽일 수 있고 인육을 먹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 세상의 종말은 그런 모습일까. 언제 어디서 죽음을 만날까 두려운 것은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침마다 아버지의 온기를 확인하는 어린 아들, 꿈속에서 죽음을 만나고 아내를 기억하는 남자. 살아남기 위해 먹어야 했고 끊임없이 걸어야 했다. 걷고 또 걷고. 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무겁고도 무거운 여정이었다. 책을 읽는 나는 점점 지쳐갔다. 세상의 끝을 향한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종말은 또 다른 시작일까.
할 일의 목록은 없었다. 그 자체로 섭리가 되는 날. 시간. 나중은 없다. 지금이 나중이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 너무 우아하고 아름다워 마음에 꼭 간직하고 있는 것들은 고통 속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슬픔과 재 속에서의 탄생. 남자는 잠든 소년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나한테는 네가 있는 거야. 본문 64쪽
어디에도 빛은 없었고 공기마저 절망처럼 느껴진다. 살아남기 위해 손에 꼭 쥔 총 한 자루, 무엇이든 먹을 수 있고 입을 수 있는 것을 운반하기 위한 카트, 경계를 늦추지 않는 눈동자, 남자를 떨어지지 않는 아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처절하다. 끔찍한 고통속에서 살아남은 어린 아들은 새로운 세상을 위한 신이 선택한 존재인가. 소년은 세상에 빛이 되고 불을 켤 것인가. 결국 아버지의 죽음으로 세상에 홀로 남은 아들, 아버지를 두고 떠날 수 없었던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빠하고 매일 이야기를 할게요. 소년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잊지 않을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본문323쪽
그들의 여정은 끝이 났다. 페허가 된 세상 속으로 아버지는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을 위해 아들은 살아남았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바다를 향하던 그들이 향한 곳, 마침내 도착한 그 끝에 남은 것은 희망이었을까. 그곳에는 희망과 구원이 있을까.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다. 여전하게 내게는 잿빛 연기로 둘러싸인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