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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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고 있는 요즘, 수줍은 봄을 만났다. 알싸한 봄 내음을 터뜨릴 것 같은 시가 변덕스런 장마로 지친 마음을 잊게 한다.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라는 제목은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의 속삭임 같다. 사실, 문장(http://www.munjang.or.kr/)에서 현재 문학집배원인 나희덕님이 보내주는 메일을 꼬박 꼬박 받고 있었지만 차분하게 듣고 읽어 내려가지 못했다.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든다.  '시' 라는 문학 장르는 얼핏 우리와 가까운 것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무척 멀게만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렇게 매일 매일 시를 선정해서 배달하는 문학집배원 안도현 이라는 이름 때문일까, 안도현의 엮어 놓은 시는 왠지 믿음이 간다. 

 사실, 여기 수록된 52편의 시와 시인들은 내게는 많이 낯선 이름들이었다. 그 생경한 느낌을 문학집배원 안도현친절함을 베풀어 친근감으로 거들고 있다. 시를 읽어가면서 문득 시를 쓴 시인이 궁금해진다. 그는 어떤 사람 이길래, 이런 시로 세상을 흔들어 깨우고 세상을 아름답게 할까?  바로 이 시를 지은 시인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 홍신선

2월의 덕소(德沼)근처에서
보았다 기슭으로 숨은 얼음과
햇볕들이 고픈 배를 마주 껴안고
보는 이 없다고
녹여주며 같이 녹으며
얼다가
하나로 누런 잔등 하나로 잠기어
가라앉는 걸.
입 닥치고 강 가운데서 빠져
죽는 걸.

외돌토리 나뉘인 갈대들이
언저리를 둘러쳐서
그걸
외면하고 막아주는 한가운데서
보았다,
강물이 묵묵히 넓어지는 걸.

사람이 사람에게 위안인 걸.

 아, 사람이 사람에게 위안 인 걸. 자꾸만 이 구절에 머문. 시는 왜 이리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걸까?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이 시는 내게 그렇게 말을 걸고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위안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야채사(野菜史) - 김경미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의 입에 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맛없었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꽃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꽃 수북했겠다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
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나왔든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시인지 모르겠다. 정말 내가 낙타였을까. 엉뚱한 상상이 이어진다. 우리의 인생이 사막을 건너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어쩜 맞을지도 모르지 않나. 아침, 저녁 밥상에서 마주하는 야채가 감사하기까지 하다. 

 시가 가진 함축적인 의미를 생각하면 자칫 시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기 마련인데 여기 담긴 시들은 그런 걱정을 덜게 한다. 또한 이 시집에는 육성낭송시집(CD)가 함께 있어 시를 읽고 듣는 두 배의 즐거움을 만날 수 있다. 한 달에 한 권이라도 시를 만나려고 부푼 마음을 먹고 있는 내게 여기 수록된 시는 새로운 시인과의 만남을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요즘 사실, 시는 인기가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예전에 흔하게 책이나 시집을 읽으며 자투리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의 손에는 이제는 모두 핸드폰과 게임기가 자리하고 있다. 구세대로 속하고 있는 나는 그대로 여전하게 시가 좋다.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 유안진

겨울에는 불광동이. 여름에는 냉천동이 생각나듯
무릉도원은 도화동에 있을 것 같고
문경에 가면 괜히 기쁜 소식이 기다릴 듯하지
추풍령은 항시 서릿발과 낙엽의 늦가을일 것만 같아

춘천(春川)도 그렇지
까닭도 연고도 없이 가고 싶지
얼음 풀리는 냇가에 새파란 움미나리 발돋움할 거라
녹다 만 눈응달 발치에 두고
마른 억새 깨벗은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파고 있는 진달래꽃을 닮은 누가 있을 거라
왜 느닷없이 불쑥불쑥 춘천을 가고 싶어지지
가기만 하면 되는 거라
가서, 할 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라

그저, 다만 새봄 한아름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몽롱한 안개 피듯 언제나 춘천 춘천이면서도
정말, 가본 적은 없지
염두가 안 나지, 두렵지, 겁나기도 하지
봄은 산 너머 남촌 아닌 춘천에서 오지

여름날 산마루의 소낙비는 이슬비로 몸 바꾸고
단풍든 산허리에 아지랑거리는 봄의 실루엣
쌓이는 낙엽밑에는 봄나물 꽃다지 노랑웃음도 쌓이지
단풍도 꽃이 되지 귀도 눈이 되지
춘천(春川)이니까.

 내게도 그저 춘천이니까로 이어지는 젊은 날의 추억이 되살아 난다. 무료한 가을 날, 아무런 이유없이 춘천이 그리워 강의를 잊은 채 친구와 떠난 춘천행. 그러나 막상 떠난 춘천행의 기차는 김현철이 부른 ' 춘천 가는 기차'가 아니었다.  계획하지 않았던 여행은 입석으로 서울까지, 그리고 다시 춘천까지의 왕복은 고생 그 자체였다. 그래도 부서지는 햇살을 껴안은 한 장의 사진은 우리에게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도 나는 그 시간, 그 춘천이 마냥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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