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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낯선 곳에서 낯선 이들과의 만남은 계획하지 않았던 일상을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때로는 불쾌감이나 당혹감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묘한 설렘과 기대감을 불러오기도 한다. 전자를 기대하는 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자 떠나는 여행은 새로운 곳에서 삶을 정착하게 만들기도 하고 자신이 돌아와야 할 곳이 있음을 감사하게 만들기도 한다. 여행,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많은 뜻을 담고 있는 의미심장한 단어로 들린다. 소설가 김연수가 쓴 산문집 <여행할 권리>를 읽는 내내 이상은이 노래하는 <삶은 여행>이라는 말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소설가가 쓴 산문은 여타의 산문집보다 우선적으로 주목을 받는다. 작가의 기존 작품을 만나고 특히나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책을 만남으로 작가와의 즐거운 대화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김연수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아직 그렇다 라는 답을 할 수 없는 독자는 이 책에 대해 한 권의 여행기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여행기가 맞다. 그러나 보편적인 여행기와는 차별적인 여행기라 할 수 있다. 주제가 있는 여행기이며 지극히 김연수적인 주관적인 글이라는 점이다. 물론 모든 글이 그러하겠지만 여행할 권리는 특히나 그러하다.
김연수가 생각하는 문학에 대해 어슴푸레 알 것 같다고 하면 이 책이 쉽게 만나질까? 그가 지향하는 국경, 안과 밖을 구분하는 그곳에는 문학이 있었다. 그가 쓰고 싶은 문학, 그가 갈망하는 문학,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그것은 문학이었다. 그가 떠나는 여행은 문학 여행은 그의 잠재된 의식을 깨움과 동시에 확신을 심어주는게 아닐까 싶다. 일본의 도쿄에서 죽은 이상을 찾아 떠난 그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36~37년을 헤메고 있는 조선 청년과 같았고, 25살 청춘인 독일 청년 푸르미를 만난 그곳에서 그는 25살 청춘을 떠올린다.
스웨덴으로 입양되어 작가가 된 아스트리드를 만난 서울에서 같은 피가 흐르지만 한민족이라고 강하게 말 할 수 없는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문학이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작가 김사량의 중국 망명의 여정을 따라 여행하면서 그가 꿈꾸는 것은 김사량이 그러했듯이 김연수가 경계를 넘어선 문학을 소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낯선 작가들을 검색하며 지명을 검색하며 어렵게 김연수의 문학 여행기를 따라가고 있었다. 적지 않은 볼멘 소리가 목에 걸려있다. 단순한 여행기는 아니지만 지역적 특색, 적어도 방문했던 도시의 위치에 대한 정보에 대해 인색하지 않았다면 이 책은 더 많은 점수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김연수가 그러했듯이 이 책을 읽고 누군가는 이 책을 통해 만난 독일 밤베르크에서 프랑크푸르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 중국 화뻬이셩 후쟈좡 마을을 향해 떠날 결심을 하고 있을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같은 곳을 또 다른 시대에 같거나 전혀 다른 시선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이 여행의 의미는 아닐까?
혹시 한국에서 자꾸만 문학이 죽었다고 말하는 까닭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문학이란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쓸 수 있을 때 죽어가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써야만 하는 하지 않을까? 본문 201쪽
김연수가 쓴 글의 느낌을 그대로 만나게 된다면 그 황홀감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김연수는 문학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어디를 가든 문학을 통해 자신을 찾고 자신을 만들어 낸다. 그러기에 이 글에서 김연수라는 글을 탄생시킨다. 그러한 이유로 이 책은 양분된 독자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를 열망하거나 조금 실망하거나. 갑작스레 여권 사진을 찍고 싶은 욕망이 인다. 아니, 그곳이 아니더라도 어디론가 새로운 나를 발견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내게도 여행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