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섭이 가라사대
손홍규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책을 들고 한참이나 표지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유전자 변이를 일으킨 소인가, 인간인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AI 로 인해 많은 닭과 오리, 가금류들은 살처분되고 있으며 오늘도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의 촛불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우리의 머리속에는 쓰러져가던 끔찍한 소의 모습이 아직도 남아있다. 혹 광우병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게 아닐까? 이런 가상의 시나리오를 쓰게 하는 이 책( 봉섭이 가라사대, 창비출판),  내게 어떤 말을 걸어올까. 

 우선 표제작인 '봉섭이 가사라대' 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봉섭의 아버지, 응삼은 소를 키우면 살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의 한 모습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가 소와의 인연이 각별하다는 것이다. 아들, 봉섭이가 소를 팔아 가출을 했을 때도 담담하게 새로운 우사를 지어 소를 기르고 그러다 소 싸움꾼이 되었다. 자신의 품을 떠난 자식들, 그리고 아내. 그의 곁에 남은 것은 말썽꾼 아들과 우직한 눈을 가진 소뿐이었다. [털빛도
여느 황소보다 짙은 암갈색을 띠고 있으며 골격부터가 남달랐다. 134쪽]  
 
 이처럼 자신을 알아주는 소, 점점 응삼은 소를 닮아간다. 소처럼 되새김질을 하는 응삼, 사람들을 대신해 농민회 집회에서 활보하던 소. 이제 소와 응삼은 하나나 마찬가지다. 광우병과 수입쇠고기로 인해 소 값은 더 폭락한다. 소를 도축업자에게 넘기자는 봉섭의 제안에 마지못해 수락한 것은 자신 스스로의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어디 소와 닮은 사람뿐이겠는가. 생명줄처럼 여기는 닭과 오리를 살처분하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그네들과 함께 평생을 살았으니 그네들을 닮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소를 잃은 사람들, 닭을 묻은 사람들, 그들이 머물 곳은 어디인가.  

 또한 상처나 슬픔을 모두 자신만의 푸른 괄호속에 넣어 버린 한 촌부(村婦)의 이야기를 그린 '푸른 괄호'는 어떠한가. 살기 위해 자식을 키우기 위해 농작물에 농약을 치고 그 농약에 병들어버린 삶은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엄마 몸 속에 농약이 쌓여 있으면 얼마쯤은 내 몸에도 흘러들어왔겠지.  하긴 내 몸에 농약이 쌓여 있다면 그게 엄마 탓이겠어. 이십칠년 동안 내가 먹은 것들 떄문이겠지.207쪽] 그들에게 질책의 손가락을 겨눌 이는 아무도 없다.

 이 두 단편만으로도 소설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게 된다. 우리 시대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그들은 명확하게 짚어낸다.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틀리다라고 말하는 편견과 오류에 대해 작가 손홍규 '이무기 사냥꾼', '뱀이 눈을 뜬다' 는 소설을 통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 고용이라는 이름으로 비정규직, 계약직, 임시직으로 이어지는 내몰림을 방관하는 정부를 고발한다. [우리 할아버지, 죽은 척해서 살아났어요. 인도군 들어올 때도, 사람 많이, 죽었어요. 우리 아버지, 죽은 척해서 살아났어요. 신의 뜻으로, 살아났어요. 내 동생 호랑이, 죽을 때, 나도 아버지 옆에서, 죽은 척했어요. 죽는 거, 부끄럽지 않아요.  언젠가, 모두, 죽어요. 죽으면, 고통에서 풀려나요, 그래서 살아남아요. 죽고, 살고, 다 하나예요.99~100쪽] 살아남기 위해 죽은 척하는 모습, 일해야 하기에 수치심과 모욕감을 삼켜야 하는 많은 이들의 현실을 세상에 드러낸다.
 
 이제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점점 잊혀지는 80년 광주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최후의 테러리스트 최초의 테러리스트 테러리스트들 이라는 연작소설은 광주 사태를 직접 겪은 이들로 이어진 2세대, 3세대의 내재된 슬픔을 엿보게 한다. 소설의 시작을 보면 1980년의 5월 18일 광주와는 상관없는 위싱턴주의 쎼인트헬렌스 화산의 폭발은 성층권까지 올라간 화산재는 아직도 세계를 떠다니고 있다. 251쪽 이처럼 생뚱맞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라는 믿음을 준다. 광주가 남 상흔은 고엽제나  원자폭탄보다 더 깊게 뿌리 박혀있음을 강조하고 싶은 표현이다.

 손홍규소설집 '봉섭이 가라사대'는 의미있는 소설집이다. 80년대를 겪지 않았어도 그 시대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역사이고, 미국과의 FTA재협상을 외치는 촛불을 든 지금의 고등학생들은  또 하나의 역사가 될 것이다.  손홍규는 시대를 바로 보는 눈, 그리고 직언할 수 있는 손을 가졌다.

"소설이 무엇인지 누가 확신 할 수 있을까. 소설의 정의는 지금이 순간에도 수정되고 있는데. 언젠가 세월이 흐르면 그때의 소설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과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이 되겠지. 그리하여 결국 소설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삶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처럼 신비로워지겠지."  68쪽 이 소설집을 대표하는 이 한 문장이 우리에게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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