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줏빛 소파
조경란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5월
평점 :
품절


 조경란의 ''를 읽으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이 책을 만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혀'에 대한 뜨거운 소문에 휩싸여 '혀'를 만나기 위해 '국자 이야기'를 읽었고 뒤이어 혀를 만났다. 그리고 이제 앞서 만난 책을 이어 '자줏빛 소파'를 손에 들었다. 2007년의 '혀'와 2000년의 자줏빛 소파는 두 소설 사이의 긴 시간에서 느껴지듯이 그 느낌이 많이 달랐다. 그녀의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자줏빛 소파를 비롯한 9편의 단편에서도 그녀만의 그려낼 수 있는 사물에 대한 감각적인 묘사는 여전했지만 이 소설집에서는 빛이 사라진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의 자줏빛 소파 : 편지 쓰기의 형식을 빌어 누군가에게 자신의 내면을 쏟아내는 소설이다. 말로 할 수 없는 세세한 감정 하나 하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혼잣말을 하는 것과 같아 그것은 그녀가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방법으로 보여진다.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담담하게 써내려가는 그녀를 상상한다. 홀로 앉아 뜨개질을 하는 그녀를. [잎이 지고 나면 꽃이 피고, 꽃이 지고 나면 잎이 지고 마는 식물이 있습니다. 잎과 꽃들은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34족 나의 자줏빛 소파] 닿은 듯 하면서 닿지 않는 꽃과 꽃잎처럼 그녀는 편지를 수신 할 그 누군가와 닿고 싶은 소망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읽고 나니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이름 모르는 누군가에게 긴 장문의 편지를 쓰고 싶은 생각이 몰려온다.

 망원경 : 세상 사람들의 소식을 연결해주는 곳인 우체국에 근무하는 주인공. 그러나 정작 그는 세상과의 소통이 두려운 사람이다. 매일 매일 할머니의 편지를 기다리며 우체국에 오는 계집아이도 그와 다르지 않다. 목에 건 망원경으로 세상을 보려는 그. 아름다운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망원경으로만 바라보려 하는 그. 그가 진정으로 보고 싶어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유리 동물원 :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이었다. 오피스텔 관리인의 자격으로 열쇠를 가진 주인공은 남몰래 그네들의 집에 들어가 청소를 하기도 하고 남잠을 자기고 하며, 돈이나 귀금속을 몰래 훔쳐나오기도 한다. 유리 동물원으로 그려진 오피스텔, 인간의 훔쳐보기 심리, 집 밖과 집 안에서 그려지는 사람들의 이중적인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소설. 그러나 과연 유리 동물원이라는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가난한 친정,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남편, 그리고 오피스텔이라는 똑같은 구조 속에 살고 있는 다른 형태의 사람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도 어렵지만 자신의 행동조차 스스로에게 납득시킨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스럽게 깨달아지는 기분이었다. 164쪽 유리 동물원] 자기 자신 조차 자신을 이해 할 수 없는 주인공의 삶은 무기력하기만 하다.  무거운 열쇠 꾸러미를 내던져버리는 그녀는 무기력한 자신의 삶을 잠가두었던 열쇠도 같이 버린 것일까? 자꾸만 그녀가 생각난다.

녹색 광선 : 같은 날 같은 시각, 자신을 둘러싼 공간의 사람들에게 모두 단수가 된다. 그러나 나를 제외한 모든 이는 그것을 대비하고 있고 나만 고립된 느낌이다. 애인과의 이별, 세상과의 단절. 헤어진 그녀의 목소리를 찾아 매일 전화를 건다. 그러나 그녀를 찾을 수 없다. 단수가 되어도 식당은 여전하게 장사를 하고 주인집은 커다란 물탱크에 그에게 없는 물이 가득하다. 지저분한 집, 악취가 나는 집, 그녀가 없는 집, 그에게 필요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피아노 조율을 하며 한 마리의 강아지와 살고 있는 여자의 상처를 들려주고 있는 아주 뜨거운 차 한 잔  이승과 저승의 중간 공간에 헤매는 망자가 화자가 되어 사랑하는 남자를 주시하고 그의 행동을 묘사하고 있는 잔의 밑바닥에 남아 있는 커피 찌꺼기의 무늬  아버지의 죽음, 동생의 이민, 그리고 남겨진 주인공와 늙은 노모. 무미건조한 일상속에 날아든 낯선 소녀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식물들.  내게는 난이한 소설로 기억되는 오늘의 요리, 물고기 아파트.

[가슴 밑바닥에 묻어둔 지옥 하나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고, 그런 말들을 그렇게 쉽게 해서는 안된다. 224쪽 아주 뜨거운 차 한 잔] 누군가를 알아가고 그와 소통하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말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열지 말아야 할 깊은 문은 두드리지 말아야 한다. 시간이 흐른 뒤 진정한 소통이 이뤄지는 순간, 그 문은 자연스레 열리게 될 것이다. 세상과의 소통, 그것이 이 소설이 내게 건네는 말이 아닌가 싶다. 간절하게 필요한 소통. 더이상 혼자가 아닌 삶.

조경란의 소설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불안정하고 위태로와 보인다. 누군가와 이별하고 누군가를 잊지 못하고 누군가와 소통하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고립된 공간에 홀로 있는 그들, 몸부림치는 그들의 모습이 눈물겹다.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아다니고 부르며 그리워하는 이들. 그들에게 빛이 필요하다. 조경란, 아마도 이 소설집을 쓸 당시 그녀에게도 빛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자줏빛 소파'에서의 짙은 그림자는 '국자 이야기'를 통해 조금 옅어지고 있었다. 조경란이 '혀'를 통해 보여준 사랑에 대한 욕망과 열정의 뒤를 이을 소설에는 어떤 빛이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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