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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 이야기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평점 :
처음 접하는 작가나 책은 두려움이 앞서기도 한다. 요즘 한창 유명세를 타고 있는 '혀'를 읽기 전에 이 책을 먼저 읽기로 했다. 조경란이라는 소설가의 이름이 낯익은데도 나는 왜 그녀의 책을 선뜻 선택하지 못했을까. '나의 자주빛 소파' 나, '불란서 안경원'등 기존의 작품을 기억하고 있는데 직접 만나지 못했다. 아마도 '혀'를 구입하지 않았더라면 '국자 이야기'는 그렇게 이름만 기억되는 그녀의 작품이 되었을지 모른다.
이 책은 모두 8편의 단편을 싣고 있는데 화자가 대부분 나로 시작하는 1인칭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마치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듯 무척 가깝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소설속 화자의 모습이 너무 평범하면서 일상적인 모습이라 조금 놀라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런 점이 이 작가의 색이 아닐까 싶은 어설픈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나로 시작하고 있지만 때론 나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를 묘사하기도 한다. '국자 이야기' 라는 소설은 외삼촌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되는 나는 나의 감정의 균형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결국 외삼촌과 사촌에게 존재하는 균형이기도 했다. 외삼촌의 국자로 표현되지만 그것은 국자가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작가 자신과 가족의 일상이 아닐까 의심하게 하는 '나는 봉천동에 산다'는 봉천동 일대를 아주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그 곳에 터를 잡고 살게 된 아버지와 나를 중심으로 하루 하루 그저 그런 날들을 이야기한다. 그 과정에서 나와 아버지는 무척 다른 사람처럼 보여지지만 또 한편으로는 봉천동이라는 공간의 모든 것에 애정을 담고 있다. 이 소설은 또한 '난 정말 기린이라니까'로 연결되어 화자는 역시나 글을 쓰는 작가이고 아버지는 여전하게 구직광고를 내고 사람들에게 소외당하는 고양이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 안에서 아버지와 나는 함께라는 공존을 바라본다.
소설속 화자들은 또 무척 많이 걷는다. 걷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요즘같은 빠름을 중시하는 세상에서 걷는다는 것은 느림이고 한 편으로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우리가 지나치는 많은 것들을 천천히 걸으면서 다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봉천동 일대를 걷는 것을 시작으로 '100마일 걷기'의 주인공은 함께 살았던 엄마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과 부재를 걷기로 달래려 한다. 그리고 그 걸음의 끝은 나 혼자의 삶에서 타인이 있는 세상속 사람들과의 만남을 의미하기도 한다.
'입술' 과 '좁은 문'이라는 단편은 다른 작품과는 다른 색을 가진 소설들이다. 특히나'입술'은 소리를 내어 말을 하는 수단인 입을 통해 우리가 쏟아내는 말들의 진실성에 대해 그리고 말이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와 신뢰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에 대해 풀어내고 있다. 사람간의 관계 맺음에 대해 점점 말이 줄어듦은 상대와 나와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입술'을 통해 알게 한다. 이 소설은 무척 감각적이며 아직 만나지 않은 그녀의 소설 '혀'를 궁금하게 한다. 여전하게 말을 하고 있지만 상대에게 결코 나를 드러내지 않는 소설속의 화법은 누구나 한번쯤 써 보았음 직한 상황들이라 마치 우리가 겪게 되는 일상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여전히 변하지 않은 건 예나 지금이나 나는 많이 먹고 느리게 말하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세월은 가고 많은 것은 변했으나 이상하게 나는 항상 나인 것 같다. ' 293쪽 작가의 말중에서.
작가의 말이 그대로 소설에 있다. 봉천동을 걸으면서 수많은 고양이들을 만나고 방향제시 보도블록의 끝에 서있고 공포로 다가오는 모서리를 견디고 있다. 그러면서 그 과정에서 만나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작가가 만들어낸 특별하지 않는 일상을 살고 있는 주인공들은 서로간의 거리를 좁히려 하고 서로간의 부재를 또 다른 누군가로 채우기를 소망하고 있다. 아직 조경란의 글에 대해 명확하게 꼬집을 수 없다. 다만 그녀는 부정하겠지만 그녀의 느림과는 반대로 그녀의 글은 내게 명민함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