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릉에서 - 박솔뫼 소설집
박솔뫼 지음 / 민음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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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부드러운 숨결, 나란히 걷는 두 사람, 잠깐의 만남과 긴 이별. 박솔뫼의 소설집 『영릉에서』을 읽고 내가 떠올린 것들이다. 박솔뫼의 소설을 오랜만에 읽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이미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박솔뫼를 그리는 장면이 그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박솔뫼는 여전히 공간과 시간, 그리고 기억을 소중하게 다루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뭐,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박솔뫼가 쓰는 소설과 내가 읽는 소설의 끝이 같을 수는 없으니까.

박솔뫼는 사건이나 서사가 아닌 한순간을 포착해 그것을 시작으로 조금씩 원을 만든다고 할까. 그래서 반복이 이어지고 어떤 장면은 중첩되고 과거와 현재가 오가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원준이와 정목이 영릉에서」는 원준이는 정목이와 정목이 아버지의 트럭을 타고 계속에 놀러 간다. 그러다 정목이 아버지가 먼저 떠난 걸 알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 과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어른들에 대한 기억. 그런데 묘한 건 이 소설이 아름답고 좋으면서도 울컥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때의 기억은 남았지만 연락은 닿지 않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 평범하고도 당연한 일. 왠지 모를 쓸쓸함과 슬픔의 조각이라고 할까.

정목이와 원준이가 정목이 아버지를 따르는 것처럼 정목이와 원준이를 따르는 것이 있었는데. 뒤를 돌아보면 알 수 있겠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햇빛과 선명한 파란색의 하늘은 그대로이고 그것은 어느 다른 날의 햇빛과 하늘과 구름과 같다. 그 뒤를 따르는 것은. 어느 날은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날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원준이와 정목이 영릉에서」, 13쪽)

박솔뫼는 특정 장소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영릉이 그러하듯 나머지 단편에서도 독자를 장소로 이끈다. 장소에 대한 에피소드가 아닌 그곳에 도착해서 마주한 기억, 그러니까 그곳에서 만난 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을 꺼내 들려준다. 「천사가 우리에게 나타날 때」의 부산, 「극동의 여자 친구들」속 중부시장, 「아오모리에서」에서는 아오모리다. 그래서 소설이 아닌 일상의 기록처럼 읽히는 부분도 많다.

김연덕의 『아오리 아니고 아오모리』 때문에 「원준이와 정목이 영릉에서」를 읽고 「아오모리에서」를 다음으로 읽었다. 「아오모리에서」는 9월의 아오모리에서 많은 이들을 만난 이야기인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처럼 사람들이 등장하고 사라지고 새로운 사람이 등장한다. 마치 꿈같기도 한데 덕분에 나는 9월에는 아오모리가 생각날 것 같다.

나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을 느리게 외우며 어떨 때는 누군가를 알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대개는 누구도 잘은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하지만 그것이 슬프지 않았고 기꺼웠다. 나에게 얼굴을 보여준 사람들 내 얼굴을 보아주는 사람들 역시 나와 같지 않을까. (「아오모리에서」, 188쪽)





이 소설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움직임 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극동의 여자 친구들」, 「스칸디나비아 클럽에서」, 「투 오브 어스」 세 편의 연작소설이다. 「극동의 여자 친구들」의 화자 강주는 중부 시장에서 커피 배달 아르바이트를 한다. 오가며 마주한 간판, ‘움직임 연구소’. 움직임을 연구하는 곳이 있다니. 정말 흥미롭다. 밝은 눈을 가진 이만이 그곳을 발견하고 방문할 것 같은 느낌이다. 세 단편의 화자는 움직임 연구소의 워크숍에서 자신이 움직이는 방식에 대한 설명을 말하고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구현한다. 자신이 움직이는 방식에 대한 설명이라니. 나의 움직임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상상하기 어렵다. 내 몸을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 혹은 잘못된 자세 같은 것만 떠오를 뿐이다.


세 편의 이야기는 ‘움직임 연구소’란 공통분모가 있지만 그보다 작가가 더 중요하게 말하고 싶은 건 그들이 오가며 마주하는 공원과 지금은 부지로만 남은 ‘미극동공병단’에 대한 것이다. 1950년대의 공간과 그곳에서 있었을 사람들의 시간을 기억하는 것. 잊히고 사라지는 공간을 기억해야 하는 의무 같은 것이라고 할까. 미극동공병단 근처를 걷고 공원에서 보드를 타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나누는 이야기들. 매일 걷고 스치는 지나는 공간이 지닌 기억을 헤아리고 회상한다고 할까.


다른 소설이 주로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만나게 되면 알게 될 거야」는 조금 다르다. 기정은 자신의 집을 친구에게 내어주며 서원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 서원은 기정과 지내면서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커진다. 기정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서원이 기정과 연결된 사람들과 만나며 기정을 향한 마음은 변화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자신의 머리카락과 이마 눈썹과 피 눈물과 피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한다는 것이 마치 바람의 호흡을 살피고 구름과 별의 움직임을 헤아리는 일처럼 중요하였고 서원이는 자신과 주변의 일들을 하나씩 천천히 생각했다. (「만나게 되면 알게 될 거야」, 162쪽)


모든 사랑은 언제나 늦게 찾아오며 이미 시작되어 있다는 것, 이미 시작되었고 다른 세계에서 찾아온다는 것을, 또한 사랑은 어긋나며 어긋난 대로 반복된다는 것을 깊이 이해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서원이가 사랑을 만나고 알게 된 사실이며 콧물에서 벌어진 일이자 서원이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만나게 되면 알게 될 거야」, 167쪽)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걷기를 생각하면 서원이 기정을 향한 마음의 걷기의 속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좋아하는 마음이 커져서 빠르게 걷는 마음, 그리고 조금 멀어져 천천히 걷는다. 마침내 그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돌아서는 마음의 걷기. 그것은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도 있다. 걷기와 움직임, 이 소설은 그렇게 연결된다.

소설을 읽으며 종종 검색을 했다. 영릉, 중부 시장 건어물, 명동 성당, 부산. 그리고 박솔뫼 작가를 검색했고 단편 「사과」로 올해 이효석 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사과」가 궁금해졌다. 이 소설집을 읽지 않았다면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시작은 「원준이와 정목이 영릉에서」가 좋았다는 blanca 님의 댓글이었다. 「사과」로 이어지는 것까지 마음이 흡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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