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계단을 보라
윤대녕 지음 / 세계사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저 이름으로만 기억하는 작가,윤대녕. 최근작인 [제비를 기르다]에 호평을 들은지라 내심 그 책을 만나봐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나 언제나 그렇듯이 읽고 싶은 책은 계속 쏟아져 나오고 그 순간 무엇인가를 선택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다. 우연히도 최근작이 아닌 그의 작품을 덜컥 사게 된 것은 8편의 소설 중에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 이라는 단 하나의 단편 때문이었다. 목마름을 시험하려는 듯 목차도 맨 끝에 수록되어 있었다.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
그 사막까지 가는 도중 나는 또 다른 많은 사막들을 건너고 있음을 알았다. 윤대녕의 이 소설 집에는 끝없는 사막과 알 수 없는 공허감과 잡히지 않는 형체를 알 수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모습과 갈등하고 존재하지 않는 영혼을 찾으려 헤메이는잃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배암에 물린 자국 산책길에 아무런 준비없이 만난 뱀은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강한 독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이 뱀이 아님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뱀에 집착하는지 알 수 없다. 겨울 동면에 들어갔을 것이 분명한데 주인공은 아직도 그 뱀을 찾아다닌다. 이 소설 속에서 남겨진 것은 분명 자국일 것이다. 그것은 나 스스로 만든 자국임을 언젠가는 주인공도 알게 되리라. 어떤 것이든 지나가면 잊어버려야 함을 알지만 그 상흔 속에서 자꾸만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억하기에 그런 것일까? 주인공이 찾는 단순한 뱀일까?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맥락의 소설은 표제작인 남쪽 계단을 보라 에서도 보여진다. 어느 순간 나의 시간이 나를 제외한 타인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것만 같은 느낌. 그들과 동떨어진 세상에 살고 있는 느낌을 경험했다면 조금은 쉬운 소설이 되리라.  

무척 재미있게 만나지는 소설은 신라의 푸른 길 자나가는 자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다.물론 이  두 소설 속에도 발화하지 못하고 스스로 꺼져버리는 내면의 소리가 있다. 우연하게 경주를 향하는 버스에 동승한 남녀의 대화는 헌화가를 논하다가 어느 한 지점에 서로가 헌화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더 이어나가고 싶은 마음속 욕망을 자제하는 글의 묘미가 탁월하다. 그에 반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과정에서 도저히 빠져 나오지 못하는 자나 가는 자의 초상 속의 인물들은 무척이다 답답하게만 보이지만 삶이란 아무리 낮게 엎드려 있어도 때로 조사관처럼 어떤 응답을 요구해 오게 마련인가 보다. 99쪽  이 문장 하나로 그 답이 될 듯하다. 

가족사진첩과 새무덤 또한 부재자의 강한 존재를 느낄 수가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억하는 아들과 어머니,이제 그 자리에 아내가 함께하면서 다시 살아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 또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것도 두 소설에서는 아버지의 부재와 존재에 상관없이 그들과 화해하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사랑도 삶처럼 하나의 신성한 노동이란 걸 알게 되는 날 우리는 비로소 자신들과 화해하게 되겠지.109쪽 기억 속에 있는 기존의 아버지가 아닌 새로이 맞이하는 가족과 아버지에 대한 강한 유대감을 원했음이 분명하다.

이제 그 길로 가는 마지막 길목에 다다랐다. 사막의 거리 바다의 거리 라는 소설엔 메마른 도시가 있다. 그 안에 사막도 있다. 매일 매일 만나는 이 곳이 사막의 거리가 된다는 느낌이다. 미로같은 골목길을 지나 만나는 세상,그것이 사막일 것이다.그러나 그 안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것은 사막을 만나는 누구에게나 오는 것은 아니리라. 안개속을 걸어가는 듯한 모호함으로 그 길을 헤치니 이제 그 끝에 도착했다.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을 만난 것이다. 사막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던 것인가? 자문하지만 그건 아니다. 사막의 선인장이 아닌 백합을 결합시킨 것이 궁금할 뿐이었다. 그 황량한 사막에 피아노를 접목시킨 것이 나의 목마름의 가장 큰 원인이리라. 사막을 향해 가는 주인공은 어릴 적 사막을 꿈꾸던 친구를 기억한다. 시인이 되어 죽음을 앞 둔 그와 함께 사막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 끝에서 그가 치던 피아노 연주를 울리게 하고 싶었던 걸까? 잃어버린 그 시절을 돌아보고 싶었던 건가?

심연에서 올라오는 감정의 옷을 한 겹 한 겹 조심스레 벗겨내는 숨막히는  작가의 시선이 있다. 그의 글속에 서성임이 느껴진다. 그 서성임을 과연 무엇일까? 너에게 가고 싶은 서성임이었을까? 사막으로 가로막힌 너에게로 향하고 싶은 소망이었을까?
사막은 가령 이런 식으로 [발생]한다. 너와 나 사이에 팽행하게 지속되어 있던 긴장의 끈이 한수간에 끊어지고 그리하여 아득한 거리로 서로 밀려나면서 그 사이에 황량한 모래벌판이 가로놓이게 된다. 256쪽 
작가가 발생이라고 표현한 사막,나와의 많은 관계 속에서 어쩜 지금 어느 누군가와 사이에는 사막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온다. 그러나 사막을 건너온 백합이 깊게 뿌리를 내려 새로이 꽃을 피울꺼 라는 소망을 갖게 하기도 한다. 무척이라 길게 그리고 어렵게 다다른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을 만나고 나니 사막의 모래바람을 지나 오아시스처럼 자리잡은 나만의 백합을 만나고 싶은 바람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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