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창비교육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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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종영한 드라마 <옥씨부인전>을 즐겁게 시청했다. 노비의 딸로 태어났지만 양반의 아내가 되고 외지부로 약자와 소수를 변호하는 당당한 여인의 삶. 허주은 장편소설 『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에서 다모 ‘설’을 만나며 <옥씨부인전>의 주인공 구덕이(옥태영)이 떠올랐다. 시대적 상황 때문에 억압받고 나를 숨기고 살아야 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그 설정만으로 흥미롭다. 거기다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소설은 입체적으로 살아난다. 『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의 이 모든 걸 두루 갖춘 소설이다.


소설은 정조 승하 후 어수선한 조선의 한양에서 살인사건의 현장에서 시작한다. 여인의 시체를 마주한 이들은 잔인함에 경악한다. 코가 베인 채였다. 양반의 자제를 누가 이토록 끔찍하게 죽였을까. 시체를 살핀 다모 설은 한성부 포도청의 종사관 ‘한도현’을 돕는다.


설은 왼쪽 뺨에 비(婢)라는 낙인이 찍힌 열여섯 살의 소녀로 호기심이 많고 당차다. 인천 흑산도 출신으로 포도청 노비로 팔려왔다. 설은 한양에 온 목표가 따로 있었다. 한양에서 오빠 인호의 소식을 듣는 것. 언니는 오빠가 죽었다고 했지만 설은 오빠가 살아있을 것만 같다. 친구도 동료도 없는 설을 차별 없이 대해주는 이는 종사관뿐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종사관을 보면 자꾸 오빠 생각이 나서 더 열심히 종사관을 돕는다.


죽은 여인의 하녀 ‘소이’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아씨는 하녀에게 종으로 태어난 사람은 없다며 동등하게 대해줬고 아씨에게 정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건 당일 누군가의 편지를 받고 그를 만나러 나갔다는 사실이다. 편지를 보낸 이는 누구일까. 혼처가 정해진 양반 규슈에게 정인이라니. 그 사실을 알고 혼인할 집안에서 벌인 일일까. 아니면 자신의 정체가 탈로 날까 두려웠던 정인의 짓일까. 아니면 소문대로 서양의 이교 때문에 죽였을까. 사건의 실체에 다가갈수록 의문은 커진다. 모든 걸 말해주던 소이가 도망치고 종사관과 설은 소이를 찾아 산을 오르다 호랑이와 마주친다. 모두가 두려움에 떠는 상황에서 설은 활을 쏘아 종사관을 살린다.


이를 계기로 종사관은 사건이 해결되면 설이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도록 돕겠다 약속한다. 종사관을 향한 믿음은 커지는데 설은 혼란스러운 일과 마주한다. 종사관의 의심스러운 행적으로 죽은 여인이 살해당할 시간에 그녀와 지나친 것이다. 왜 그것을 숨긴 것일까. 종사관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설을 무시하는 포졸 견은 그것을 빌미로 종사관을 함정에 빠드린다. 종사관을 믿고 따른 설도 혼란스럽다. 어느덧 설과 하나가 되어 소설을 따라가던 독자도 마찬가지다. 왜 종사관은 진실을 밝히지 않는 것일까. 그날 밤, 술에 취한 종사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나의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과 권력의 중심에 있던 정순왕후가 남인을 치기 위한 신유박해의 역사적 사실을 들려주는 소설은 끝을 향할수록 더욱 흥미진진하다.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천주교 박해의 생생함을 전달하다. 그 가운데 설의 눈부신 활약과 성장은 대견하다.


나를 구해줄 사람은 나 하나였다. 견이 또 머리를 후려지쳐하자 나는 그의 손을 피하며 벌떡 일어났다.

“내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요?”

되묻는 목소리가 쇠처럼 소리가 단단했지만 무릎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활을 제대로 들 줄 아는 여자요. 본인이 표적을 맞힐 능력이 없다고 나를 탓하지 마세요” (119쪽)


설은 종사관을 돕는 노비가 아닌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로 자신을 억압하는 이들에게 굴하지 않는다. 이는 작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차별과 편견에서 벗어나 모두가 동등한 삶, 연대와 공감이 필요한 지금을 사는 모두에게 말이다.


하지만 익숙한 설정과 드마라가 많기에 『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이 지닌 유일한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게 아쉽다. 어쩌면 역사적 사실이 강력한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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