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투성이 연인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그녀의 책을 읽었다. 책에서 분홍빛 봄내가 났다. 가을이 깊어지고 있어 점점 추워지고 있는데 그녀의 책에서는 봄이 보였다. 겨울이 꾸는 꿈이라는 봄, 무언가 새로운 희망이 보이는 듯한 봄말이다.깨지고 쓰러지고 화내고 울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들에서 나를 보았다. 사랑이라는 것에 울고 살아가는 도중에 쓰러지고 내동댕이 쳤었던 나의 영혼을 보게 되었다.지나간 일들이라고 생각했던 감정의 조각 조각들이 그 곳에 함께 있었다. 정미경이라는 작가는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둔탁하지 않은 목소리로 조근 조근한 어투로 말하는 그녀는 어떻게 감춰진 삶의 단면들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을까? 그러기에 그녀의 글을 읽는 것이 나는 너무 행복하다. 6편의 단편 모두 하나의 그림의 퍼즐 조각들이다. 그 그림의 제목은 무엇일까? 나와 당신과 우리일까? 살아 숨쉬고 있는 우리의 속내들이 하나씩 하나씩 담겨져 있다.

[나릿빛 사진의 추억] 헤어진 애인의 흔적을 발견하며 행복했던 날들의 회상을 지나 단 한 번의 통화로 현재의 현실은 크나큰 지진을 겪어내기도 한다. 사진작가였던 성민이 찍었던 옛 애인의 사진은 지진의 근원지가 된다. 그로 인해 다시 찾은 일상은 평탄치 않은 길을 걸어가게 된다.(존재의 의미를 재는 내 속의 저울 눈금을 조정하고 나자 찾아온 것은 마음의 평화였다.11쪽) 나를 버리고 나를 낮추고 그저 세상에 속하려 하는데 세상은 때로 강한 바람으로 저버리려 한다. 우리도 그러했던가?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기도 하고 찢어버리고 싶은 필름을 발견하게 되면 그저 아름답다 라고 지나갈 수 있는 지점에 살고 있는지 생각이 많아진다.

[호텔 유로,1203] 한때 잘 나가게 쇼핑을 즐기던 쇼핑중독자인 나는 이혼을 하고 수 많은 결제 고지서만이 날아오는 한 가운데 남았는데도 아직 이 현실을 직시하기 싫어한다. 자신이 작성한 원고를 읽어대는 젊고 예쁜 탤런트에게 말할 수 없는 묘한 질투에 느끼며 내적 치장은 어디론가 사라진 채 껍데기일 수 있는 명품에 눈을 맞춘다. 과거의 나는 잘 나갔는데, 그 때의 사랑은 참으로 빛나기까지 했었는데.(사랑 속에는 사람들이 흔희 기대하는 따스함,열정,몰입,기쁨,까닭 없이 터뜨리는 웃음소리 같은 것만 있는 건 아니다. 그 눈부심 속으로 들어가 보면 마치 빙산의 아랫 부분처럼 거짓과 권태와 배신과 차가움과 환멸조차 사랑의 일부분이란 걸 사람들은 모르고 있거나 잊어버리거나 한다. 55쪽 ) 사랑이라고 느끼고 사랑에 속한 감정들을 정의하는 듯한 이 글을 보면서 그 많은 단어들로 나열된 감정중에 내가 느끼는 사랑의 감정은 어느 것일까? 내게 사랑으로 남겨진 것들은 무엇일까? 어떤 것도 정답이라는 단어 아래로 떠오르지 않는다. 때때로 우리는 과거만을 보기도 한다. 과거에 내가 꿈꾸던 오늘은 이런 날들이 아니었기에 그럴까?

[나의 피투성이 연인]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소설은 주기만 하는 사랑.맹목적인 믿음에 대한 배신이랄까? 작가인 남편이 죽고 나서 그의 유작을 출판하자는 제의에 아내는 남편의 컴퓨터를 켜게 된다. 그 안에서 발견하는 남편의 짧은 글에는 또 다른 사랑이 있는 듯한 암시를 주는 문구가 있다.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도 사라지기 전에 이런 글을 접한 아내는 말하지 못하는 또 다른 상처를 스스로 만들게 되고 그 안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것이 차마 나만의 일기라 하더라도 우연하게 읽게 되는 이는 얼마나 절망스럽겠는가. (삶은 이렇게 차갑고 날카롭게,파도처럼 끊임없이 맨 살에 부딪쳐 올  모양이다. 84쪽)  아픔이 예상되는 곳에 겹겹이 두꺼운 천으로 싸맨다해도 파고드는 상처는 엉뚱하게도 맨살이 드러난 곳에서 낭자하게 피를 토하고 있기 마련이다.우리가 만나는 상처들은 거의 다 그렇게 오는거 같다.(지나고 보니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게 인생이고 어떤 일도 견뎌내는 게  인간이더라.136쪽) 돌아가는 룰렛 게임에서 내가 원하고자 하는 곳을 맞힐 수 있는게 얼마나 될까?
견뎌내게끔 그렇게 신은 인간을 만들어 놓은 걸까?

[성스러운 봄] 정말로 봄이라는 어감만으로도 세상을 깨울꺼 같은 성스러운 봄이 오기 전에 아이는 세상을 떠나고 남겨진 부부는 빚과 스스로의 질책으로 하루 하루를 열게 된다. 이 성스러운 봄이라는 소설에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이라는 것을 병원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던 아이의 모습을 통한 비유로 쓰여지고 있는데 특히나 이 문장 (질문이란,비록 불완전하더라도 어딘가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는 걸 말하겠지요.153쪽)은 정말 깊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아이의 생명연장의 결정을 묻는 의사가 하는 이 말처럼 우리는 우리의 생에서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과 수 없이 만나왔음을 경험해왔다.그러다가 또 답이 없을 것 같은 질문의 답을 찾기도 할 것이다. 사막에 숨겨진 오아시스처럼 단내음을 가진 답들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그 얼마나 황홀할 것인지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말해질 수 있는 건 고통이 아니야. 아픔을 표현할 수 있는 건 참을 수 있다는 거야.165 쪽) 나는 길지 않은 병동생활에서 이런한 문장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웃을 수 밖에 없음을.. 나를 보고 안타까워하는 그 마음을 미리 알아버렸기에 내 고통은 아프다고 말할 수  없게 된 것을. 나 역시도 정말 고통스러운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비소 여인] 이 소설 중에서 굳이 낮은 점수를 주고자 한다면 이 소설이다. 윤도 나도 최군도 모두 혼자이다. 세상에서 버려진 듯한 느낌을 가진 세 사람. 없어서는 안 될 물,밥, 공기 속에 스며드는 비소라는 독은 일정기간이 지나면 사람을 죽게 만드는데 세상을 죽이고 싶었던 윤은 그렇게 주변 사람들을 시작으로 세상에 대한 복수를 한다. 버려진 느낌을 내게 소중한 이들을 버림으로 보상받으려 했을까?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자신은 분명 속할 수 없는 세계라고 단정지으면 바라보는 세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편견과 독단일 뿐이다.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에나 향기가 나기 때문이다. 번잡스럽고 항상 시끄러운 곳에 잠시 발을 담갔다가 빼면 된다고 했지만 정작 마음의 발을 빼지 못하는 주인공처럼 마음에 그어놓은 선은 자꾸만 나를 보여주고 사랑을 주는 누군가에 의해 어느새 지워지고 만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외면하면서 살기도 한다. 그들의 웃음소리.그들의 말투.그들의 삶이 나를 비춰주는 삶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나 역시도 그들을 비추고 있기 때문일까? (존재란 스스로는 빛날 수 없는 것.누군가의 시선 속에서,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만월도 되고 때론 그믐도 되고,그런거 같아요. 243쪽) 우리는 때때로 부정하고 싶은 많은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 어떤 때는 그 관계를 끊지 못하는 내가 싫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이 사는 것이다. 언제 빛을 내고 사라졌는지 기억할 수 없는 별의 반짝임을 보고 즐거워하는 내 모습은 그 언젠가 내게 베픈 친절한 사람의 손길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그리워하는 것과 같을까?

상현달에서 보름이 되고 다시 기울어져 하현달이 되어 달은 사라진 듯 보인다. 태양이 빛나는 지금도 달은 우리를 비추고 있다.나를 둘러싼 수 많은 타인들이 나를 지켜주고 있듯이. 그들이 내게 보내는 관심으로 내가 살듯이.
이 단편들을 읽는 중간 중간 나는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또 울고 싶어지기도 했다. 너무 힘들다고 떼를 쓰고 싶기도 했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을 감싸주는 두 팔을 가진 이 책을 어루만지면서 나는 그 안에서 보이지 않는 두 팔이 나를 안아주는 걸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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