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결함
예소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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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뭘까. 이 나이에 사랑이 뭐냐니. 뜬금없지만 사랑이 뭔가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예소연의 『사랑과 결함』 을 읽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 계속 그 마음이 떠나지 않는 것, 그것 때문에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도 많다는 것. 단순하게 사랑은 그런 것이다. 조금 더 나가면 그 사람의 형편을 살피는 일,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일, 그 사람의 아픔을 가져올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 함께는 아니어도 우리로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 그게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 편의 단편이 수록된 예소연의 『사랑과 결함』에서 작가는 사랑이라는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성 간의 사랑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인간, 동물, 제도) 과의 사랑 말이다. 그것은 곧 모든 관계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닫힌 결말이 아닌 박 터지게 싸우고 고집을 부려서라도 열린 결말을 지향하는 관계. 예소연의 단편 속 인물의 사랑은 좀 복잡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그들과 보낸 시간을 곱씹고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을 마주하며 미칠 것 같다.


크로스핏 센터에서 만나 친구가 된 석주와 맹지의 이야기 「우리 철봉 하자」만 봐도 그렇다. 석주는 의대생인 맹지의 남자친구가 맹지를 힘들게 하는 게 싫다. 대놓고 맹지에게 너 남자 없이 못 사냐고 할 정도다. 늦깎이 의대생 주제에 공부하며 받는 스트레스를 맹지에게 푸는 것 같고 그 모든 걸 받아주는 맹지가 못마땅하다. 그건 과거 석주가 남자친구를 대했던 모습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이용하는 지질한 방식의 사랑 말이다. 그래서 석주는 맹지가 그런 사랑을 하지 않기를 바라서 모진 말로 상처를 주고 견딜 수가 없다. 석주는 맹지에게 지질한 남자 친구는 줄 수 없는 그런 사랑을 주고 싶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석주 자신이 원했던 사랑이었다. 맹지와 같이 살며 이야기를 나눌수록 석주는 뒤늦게 깨달았다.


맹지가 덧붙였다. 너는 너를 돌봐야 해. 좀처럼 항변할 수 없었다.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나를 돌보려면 나를 돌아보아야 하는데, 나는 나를 돌아보는데 미숙했다. 일은 졸렬하게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손쓸 수 없을 만큼 좋아했다. 사랑에 있어서는 늘 나를 함부로 대하고 선을 넘어버렸다. (「우리 철봉 하자」, 33쪽)


석주 같은 마음은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 로 이어지는 연작 소설 속 희조의 마음과 비슷하다. 희조와 미정을 통해 십 대 시절, 사춘기, 청소년기의 마음이 어떻게 변모하는지 잘 보여준다. 세상과 어른을 바라보는 예민하고 비뚤어진 태도.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고등학교로 이어지는 희조와 친구 미정의 관계. 희조와 미정은 친한 사이였고 종종 미정의 집에서 희조가 자고 오기도 했다. 희조가 미정 아빠의 죽음을 목격한 이야기를 학교에서 하면서 둘 사이는 틀어진다. 전학을 간 미정이 희조가 다니는 중학교로 전학을 오고 둘은 다시 가까워지는 듯했다 다시 멀어진다. 희조는 미정을 좋아했고 일진 남자친구가 아닌 자신의 친구이길 바랐다. 희조가 미정에게 바랐던 마음은 사회적 통념으로 우정으로 불리겠지만 석주가 맹지를 향한 마음과 같지 않을까.


예소연은 우정과 사랑 사이의 미묘한 감정을 아주 잘 다룬다.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사랑의 겹을 안다고 할까. 친구나 연인과의 사랑만이 아닌 부모와 가족 간의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와 딸 사이에 흐르는 뒤엉킨 시간과 감정을 「팜」과 「그 개와 혁명」에서도 마주한다. 두 단편에서 아버지는 가족보다는 세상을, 미래를 위해 힘쓰고 투쟁한다. 단순히 세대 차이로 치부할 수 없는 부녀 사이. 아버지의 자리에서 딸의 돌봄은 안중에도 없다. 그런 아버지를 딸은 사랑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 개와 혁명」 속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는 달라진다. 딸 수민은 아버지가 보낸 시간을 헤아릴 수 없지만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자신이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모든 일에 훼방을 놓고야 마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장례식에 아버지가 키우던 개를 데리고 오게 된다. 엉망진창이 된 장례식장도 나쁘지 않고. 아버지는 아버지만의 방식으로 딸을 사랑했다.


부모 세대가 전하는 사랑을 우리는 온전히 알지 못한다. 표제작 「사랑과 결함」에서 화자인 나(성혜)를 끔찍이 사랑하는 고모(순정)의 사랑처럼. 아버지를 키우고 뒷바라지를 하느라 젊음을 다 보낸 고모. 늦은 결혼을 실패하고 동생네 집으로 돌아온 고모. 정신병을 앓는 애물단지. 엄마와 고모는 나를 두고 경쟁한다. 나는 때로 엄마의 입장에서 고모를 미워하기도 하고 때로 고모에게 받은 돌봄으로 고모 편에 서기도 한다. 사랑과 돌봄을 받을 때는 모든 게 당연하게 여겨진다. 나중에 고모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지 그 심연의 아픔을 알고 나서야 조카를 사랑하는 일이 고모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알게 된다.


어떤 사랑은 전부를 내어준다. 어떤 사랑은 아주 작다. 어떤 사랑은 지긋지긋하다. 어떤 사랑은 증오와 분노를 키운다. 어떤 사랑은 다른 사랑을 데려오고 어떤 사랑은 끝내 알지 못한다. 사랑해 한 마디가 어려웠던 순간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견딜 수 없어서 나를 내동댕이쳤던 시절로 되돌릴 수 없기에 사랑은 상처로 남지만 그 경험으로 우리는 다른 사랑을 꿈꾼다. 그 이름은 연대가 될 수 있고 돌봄이 될 수도 있다. 예소연이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은 사랑은 그런 것이다. 다양한 형태로 자리 잡은 사랑, 용기가 필요한 사랑. 사랑이라는 가능성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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