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 한정원의 8월 시의적절 8
한정원 지음 / 난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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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여름을 만났다. 겨울밤에 만나는 여름이다. 여름에 읽으려고 사두었던 책을 잠들기 전 침대에 앉아 펼쳤다. 그냥 훑어봐야지 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끝까지 다 읽었다. 이렇게 금방 읽을 책을 나는 미루고 미루었던 것일까. 이상한 건 여름에 만난 여름이 아니라 오히려 좋았다. 온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던 습한 느낌을 기억해내려 애쓰는 시간이 괜찮았다. 지나고 보면 다 그런 것이구나 싶었다. 한정원의 글로 만나는 8월은 여유롭기까지 했다. 왠지 그랬다. 시와 에세이와 사진으로 하루하루 기록한 8월은 나쁘지 않았다. 지나친 열기, 과도한 비, 알 수 없는 분노와 걱정이 스르르 녹아드는 것 같았다. 어느 해의 8월일까 짐작하다 말았다. 어느 해의 8월이 뭐가 중요한가. 8월이었고 8월이었겠지.


어젯밤에 술술 읽어 내려갈 때는 아무것도 쓸 게 없을 것 같았던 8월의 풍경은 지금 이 순간 달라졌다. 나를 수다쟁이로 만든다. 나는 뭔가 마구 쓰고 싶다. 책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의 8월에 대해서다. 어쩌면 이 책이 바라는 건 이런 마음일지도 모르다고 착각하면서 말이다. 유독 어느 해의 8월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 여름은 아팠고 두려웠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8월이나 건너뛸 수 없는 시간이다. 그래, 그런 8월이 있었지. 그리고 다른 해의 8월은 거대한 슬픔 덩어리다. 병원에서 가쁜 숨을 내쉬던 큰 언니를 만나고 큰 언니의 집에서 에어컨을 켜고 잠들었던 밤. 그게 마지막이라는 걸 몰랐던 날들. 선명하게 각인된 여름이다. 여름 위에 다음 여름이 더해지고 쌓이고 덧칠해지니 아프고 두렵고 슬픈 여름은 흐려지고 연해진다. 그래, 그런 여름이 있었지.


첫눈 같은 것은 여름에 없지

첫 땀 첫 수국 첫 매미 첫 소낙비

환호도 그리운 약속도 없고

오리나 하트나 사람으로 변신할 수 없지

적설 같은 것도 여름에 없지

흐르고 흐르고

아무것도 쌓이지 않지

모래도 옥상도 네 손도 따뜻하지

환해서 비밀도 슬픔도 잘 보이지

그림자가 쉬이 짓무르고

나무의 노래가 축축해지지

씨를 자주 뱉지

언젠가 목숨이 될 것을 겁내지 않고

휘파람을 불지 입술을 오므리지

사랑하기 좋은 모양이지 (「여름의 일」, 전문)


시를 따라 읽으며 나만의 여름의 일을 생각한다. 첫 수영복, 첫 휴가가 있던 여름,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던 여름,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걷고 뛰던 여름. 그러자 우리의 여름이 따라붙는다. 더위 따위는 상관없이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는 여름, 쏟아지는 별들을 머리 위에 두고 밤새 마주했던 여름, 오늘만 존재할 것 같았던 그런 여름. 지난여름이란 이름으로 묶음이 돼버린 여름.


겨울을 살면서 다가올 여름을 미리 걱정한다. 지난여름의 혹독한 더위를 기억하는 몸과 마음은 여름을 미워할 준비를 마쳤다.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란 제목처럼 여름을 향한 애정이 식어간다. 하지만 여름을 조금 사랑하기란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한정원은 여름을 조금 사랑한다며 본심을 숨긴다. 뻔히 보이는 그 진심을 숨길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 그러니 여름은 절대 조금 사랑할 수 없는 계절이다. 맘껏 충분히 사랑한다는 귀여운 고백이다.

나는 여름의 하늘을 조금 사랑한다. 당당하고 등등한 푸름을, 푸름을 가벼이 저버리고 소나기를 내리는 패기를, 패기를 무효하는 천진한 무지개를.

나는 여름의 밤을 조금 사랑한다. 흙과 풀과 낮이 끈기가 뒤섞인 냄새를, 짝을 찾는 맹꽁이의 전심전력의 소리를, 한바탕 꿈꾸기에 알맞은 짧음을.

나는 여름의 물기 많은 과일을, 헐거운 옷 속으로 들어오는 낮은 바람을, 오수에 빠진 사람과 동물의 방심한 얼굴을 조금 사랑한다. (「조금 사랑하기」, 일부)


여름은 여름을 사랑한다는 말은 선뜻 꺼내놓을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무자비한 여름의 비는 누군가를 다치게 하고 누군가를 혼자 남게 만들고 누군가를 아프게 한다. 점점 계절의 이름을 잃어버리는 계절이 되었다. 가을을 품은 8월이건만 가을을 밀어내는 8월이다.


한정원의 아삭하고 풋풋한 문장으로 8월을 담았다. 선명한 오후에 따라다니는 그림자를 밀치고 그늘 속으로 미끄러지는 8월. 땀을 흘리며 뛰어놀던 여름의 자리에 빠짐없이 일기예보를 확인하는 여름이 들어온다. 여름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 아니다. 여름을 사랑하지 않는다.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름이 없는 건 싫다. 여름의 시작은 수국이며, 여름의 맛은 자두니까. 여름이라고 말하면 떠오르는 그 냄새가 잊히는 건 슬픈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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