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그친 오후의 헌책방
야기사와 사토시 지음, 서혜영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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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다. 제법 굵은 비가 내린다. 이 비 끝에 이별이 닿을까. 그러니까 온전한 여름과의 이별 말이다. 『비 그친 오후의 헌책방』를 읽은 후라 그런지 비가 그치면 개운한 일상이 시작될 것 같다. 제목 때문에 궁금해서 읽은 소설이다.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은 소설인 줄 몰랐다. 헌책방에서 발견하는 낯선 이의 흔적에 감탄하거나 찾아 헤매던 책을 찾는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짐작했다. 일정 부분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은 주인공 다카코가 1년 동안 사귄 직장 선배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별이야 할 수 있지. 화가 나는 건 상대가 직장 동료와 내년에 결혼한다는 사실이다. 세상에나 이게 무슨 말인가. 다카코만 선배를 사랑한 것이고 상대는 아니라는 확인 사살. 결혼을 상대가 있으면 진즉 헤어졌어야지. 화가 난다. 화가 나. 스물다섯의 다카코는 그 일로 직장을 그만두고 혼자만의 세상으로 파고든다. 무엇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다카코는 외삼촌의 전화를 받고 외삼촌이 운영하는 진보초 거리의 헌책방에서 지내게 된다. 다카코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결정이었다. 엄마가 있는 본가로 갈 수는 없으니까.


외할아버지가 운영하던 헌책방을 외삼촌이 물려받았다. 다카코가 지낼 서점 2층은 쾨쾨한 책 냄새가 가득한 곳이었다. 헌책방에서의 일상이 처음부터 유쾌했던 건 아니다. 다카코를 바라보는 외삼촌과 단골손님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다 재밌는 책이 없을까 찾다가 헌책방 서가에서 한 권의 책을 발견하다. 작가의 이름은 익숙하지만 내용은 모르는 책이었는데 한순간 빠져들고 말았다.


책을 통해 이런 멋진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까지는 전혀 몰랐다. 왠지 지금까지 인생을 손해 보며 산 것 같은 기분조차 들었다. 더 이상 게으르게 자고 또 자는 짓은 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잠 속으로 도망쳐 들어가는 대신 외삼촌과 번갈아 가며 가게를 보면서 내 방에서든 카페에서든 책을 읽었다.


헌책 속에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많은 역사가 쌓여 있었다. 이건 결코 책의 내용에 관해서만 하는 얘기가 아니다. 한 권 한 권마다 오랜 세월을 거쳐 온 그 흔적들을 나는 여럿 발견했다. (64쪽)


다카노의 경험은 내가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 마음과 무척 비슷해 반가웠다. 침잠하던 시절 나를 꺼내준 건 가운데 하나가 책이었으니까. 다카노는 헌책방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진보초 거리를 살펴본다. 카페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그곳 직원과도 친하게 지내며 진보초 거리 헌책방에 조금씩 스며든다. 저마다 특색을 지닌 헌책방의 거리를 상상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코를 찌르는 낡은 책 냄새와 말을 거는 책을 찾아 이리저리 서가를 맴도는 모습. 책을 좋아하는 이라면 반할 책이다.


그렇다고 헌책방에서 낭만적인 로맨스나 특별한 에피소드가 등장하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런 점이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책에 둘러싸여 그 책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의 상처와 고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과 마주한다. 외삼촌과 다카코가 나누는 소소한 대화도 좋다. 실연을 당한 조카와 함께 선배에게 찾아가 사과하라고 말하는 당당한 모습은 통쾌하고 후련하다. 상대의 진정한 사과를 받았다 할 수 없지만 자신의 감정을 후련하게 말한 다카코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젊은 시절 여행을 통해 자신을 찾고자 했던 삼촌의 마음, 그 마음이 지금 헌책방에 있다는 것. 그리고 집을 나간 외숙모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그래, 그건 마음의 문제야.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자신의 마음에 진솔할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내가 있을 장소야. (88쪽)


다카코가 헌책방을 떠나 자신의 자리로 찾아가고 새로운 관계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되는 일. 뻔하지만 뻔해서 나쁘지 않다. 나를 위로하는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다카코에게 진보초 거리 헌책방이 그렇듯 저마다 그런 공간이 하나씩 있었으면 한다. 괴로움과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는 공간, 그곳에서 좋은 이와 함께 한다는 상상만으로 즐겁다.


서정적인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일이 휴식이며 나만의 공간으로 초대하는 일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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