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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 하이웨이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0월
평점 :
어른이 된 후 어린 시절의 나를 잊었다. 어떤 아이였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어른이 된 것처럼. 그 시절은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펭귄 하이웨이』속 귀여운 주인공 아오야마를 만나면서 어린이였던 내가 생각났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나. 시골을 벗어나 도시에서 살기를 꿈꾸며 TV 속 세상을 흠모하던 나. 어른이 되면 내 맘대로 살 수 있을 거란 막연한 믿음. 물로 아오야마는 훨씬 훌륭한 어린이다. 매일을 기록하며 모든 걸 연구하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어린이. 멋진 어린이였다. 어른인 나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세계를 꿈꾸는 어린이.
SF나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반할 주인공이다. 그래서 나는 아오야마의 연구와 그런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어린 시절에 상상력을 다 소진해서 그런지 아니면 지극히 현실적인 어른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좋은 아버지와 훌륭한 아들이라고 할까.
소설을 엉뚱하다. SF의 조건을 충족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어느 날 갑자기 아이들의 등굣길에 펭귄 무리가 나타난 것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이상한 모습이다. 거기다 그 무리는 이동 중에 사라지고 만다. 그 펭귄은 어디서 왔을까, 또 어디로 사라졌을까. 놀라지 말기를 바란다. 그 펭귄을 만들어낸 이가 있으니까. 그는 바로 아오야마가 다니는 치과의 누나다. 아오야마와 체스를 두는 누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줄 몰랐다. 하지만 아오야마는 의심하지 않는다.
신기한 건 계속 등장한다. 아오야마와 친구가 숲속을 탐험하면서 발견한 기인한 생물체인 ‘바다’. 자신만의 연구 노트를 지닌 아오야마와 하마모토, 그리고 우치다. 펭귄뿐 아니라 다른 것들도 만들어내는 누나. 이상한 건 펭귄을 만들고 난 후 누나가 아프다는 사실이다. 숲속에서 발견한 ‘바다’는 나름의 규칙대로 커졌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하고 아오야마와 친구들은 ‘바다’와 누나가 밀접한 관계라는 가설을 세운다. SF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게 뭔 소린가 할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어린이 아오야마를 떠올리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은가.
매일매일 어제보다 더 훌륭해지기 위해 연구에 매진하는 아오야마 곁에 친구들과 아버지가 없었다면 소년의 노력은 헛된 것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큰 의미가 된다는 걸 안다. 치과 누나는 펭귄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겠냐고 물었고, 아버지는 아오야마의 질문을 항상 진지하게 받아주고 답해준다. 누군가는 단순하게 재미있는 판타지라 할 것이다. 누군가는 성장소설이라 할 것이다. 나는 예쁜 철학 소설이라 말하고 싶다. 특히 아오야마와 우치다가 나누는 죽음에 관한 대화, 세계의 끝에 대해 아버지와 아오야마의 대화가 그렇다. 엉뚱한 생각을 그만 두고 공부나 하라고 할 어른의 모습을 부끄럽게 한다.
“난 살아 있는 동안 여러 사건을 만날 거고, 그때마다 죽을지 살지 알 수 없어. 어떤 순간이든 그 어느 한쪽이겠지? 그때마다 세계는 이렇게 두 갈래로 나뉘게 돼. 그래서 난,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반드시 이쪽의 내가 아직 살아 있는 세계에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다른 한쪽 세계에 있는 너는 죽은 거잖아? 그쪽 세계에 내가 있는 거라면, 난 우치다는 죽었다고 생각할 거야.”
“너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하지만 이쪽 세계에서는 난 반드시 살아 있어. 가지가 갈라질 때마다 난 이쪽의 사는 쪽으로, 계속 사는 쪽으로 나아갈 거야.” (아오야마와 우치다의 대화, 322쪽)
“거기에도 세계의 끝이 있구나.”
“어디요?”
“네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넌 어떻게 할 수 없는 그것 말이야.”
“난 아직도 세계의 끝에 대한 생각을 놓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무척 까다로워요.”
“그래도 모두 세계의 끝을 봐야 해.” (아버지와 아오야마의 대화, 417~418쪽)
내 앞에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세상이 나타난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체스판에서 박쥐가 피어오르고 망고가 나무가 아닌 우산에서 열린다면 그 사실을 믿을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와의 만남, ‘바다’처럼 이상한 생물이 그 정점에 있다면 그 모든 걸 나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렇게 계속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순수성을 잃어버렸고 상상력이 바닥이라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의 아오야마가 얼마나 멋진 어른으로 성장할 거라 확신하고, 먼 훗날 치과 누나를 좋아했던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 거라 믿는다. 청년 아오야마를 생각하면 기분 좋은 미소가 피어오른다. 기분 좋은 소설이다. 명랑하고 명랑한 SF소설이다.
나는 세계의 끝을 향해 매우 빠르게 달려갈 작정이다. 사람들이 도저히 쫓아오지 못할 정도로 빨리. 세계의 끝으로 통하는 길은 펭귄 하이웨이다. 그 길을 따라가면 다시 한 번 누나를 만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것은 가설이 아니다. 나의 신념이다. 오늘 계산해봤더니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3000 하고도 748일이 남았다. 하루하루 세계에 대해 배워나가면 나는 어제의 나보다 더 나아질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어른이 되면 내가 얼마만큼 훌륭해져 있을지 짐작도 안 간다. 나는 분명 밤이 되어도 졸리지 않는, 하얀 영구치를 갖춘 훌륭한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이다. (419~4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