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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자일스의 나환자 ㅣ 캐드펠 수사 시리즈 5
엘리스 피터스 지음, 이창남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8월
평점 :
뉴스를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상식을 파괴하는 무자비한 인간의 행동. 인간이 어떻게 그런 짓까지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심연에는 무엇이 있을까. 욕망을 부정할 수 없지만 비뚤어진 욕망은 제재가 필요하다. 올바른 길로 이끌 어른 같은 존재도 필요하다. 엘리스 피터스의 캐드펠 수사 시리즈의 주인공 캐드펠 수사야말로 그런 어른이 아닐까. 조만간 AI가 존경받는 어른도 만들어낼지도 모르지만 어딘가 캐드펠 수사가 존재하면 좋겠다. 서두가 길다. 『세인트자일스의 나환자』를 만나볼까.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번 이야기엔 나환자가 등장한다. 슈루즈베리 성 베드로 성 바오르 수도원의 캐드펠 수사는 수도원 가까이에 있는 세인트자일스 병원으로 향한다. 주로 나병 환자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환자들에게 허브 치료제를 전해주기 위해서다. 캐드펠을 보자 그곳에 있던 마크 수사는 반가움을 표한다. 캐드펠의 조수 마크 수사는 제법 어엿한 수사의 모습이 보인다. 때마침 수도원에서 혼례식을 치를 예정인 귀족들이 도착하는 날로 병원 앞을 지나는 일행을 보기 위해 나환자들이 가득했다. 귀족을 호위한 이들이 나환자들을 몰아내고 소리를 지르자 피했지만 유독 한 사람만은 꼿꼿하게 어딘가를 응시했다. 그의 이름을 라자루스, 보통의 나환자와 달랐다. 『세인트자일스의 나환자』의 주인공일까.
그건 그렇고 신랑 휴언 드 돔빌은 육십을 바라보는 노인이었고 신부 이베타는 겨우 열여덟 살이라는 사실에 캐드펠은 경악한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이런 혼례를 승낙했을까. 소녀의 보호자는 부모가 아닌 외숙 부부였다. 소녀에게 남겨진 막대한 유산을 갖기 위한 거례가 바로 이 혼례였다. 외숙 부부에겐 무사히 이 혼례식을 마치는 게 중요했다. 조카딸에게 어떤 일도 일어나선 안 되었다.
그런데 혼례식 당일, 아무리 기다려도 신랑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이제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면 다행인데 들려오는 소식은 돔빌의 사망 소식이었다. 혼례 전날 하인도 없이 혼자 수도원 밖을 나갔다가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밤사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을 타고 어디로 가려 했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베타의 주변 인물이 용의자가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베타를 사랑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돔빌의 하인 조슬린이었다. 돔빌도 그 사실을 알고 그에게 도둑 누명을 씌워 해고했다. 이쯤 되면 나 같은 독자도 알 수 있다. 용의자가 된 조슬린은 절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한편 도망친 조슬린은 나환자가 있는 세인트자일스 병원으로 숨어들었다. 조슬린은 친구인 사이먼의 도움으로 이베타에게 연락을 하고 도망칠 계획을 세운다. 얼굴을 가렸지만 손이 깨끗한 새로온 환자를 마크 수사는 조용히 관찰한다. 그에게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을지도 몰랐다. 이게 다 캐드펠 수사에게 배운 것이다.
마크 수사를 꼼짝 못하게 붙들어둔 건, 약속이나 한 듯 그자를 감싸는 환자들의 행동이었다. 아무런 이야기도 설명도 없이. 고통받고 있는 환자 모두가 침묵의 연대로 그의 불행을 함께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마크 수사는 경솔한 사람이 아니었다. 감히 그 물결을 거스르거나 그들의 판단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었다. (169쪽)
캐드펠 수사는 돔빌의 행적을 추적한다. 밤이 지나면 어린 신부를 맞이할 신랑이 향한 곳이 어디이며 그의 죽음으로 큰 이익을 얻을 이에 대해서. 돔빌의 조카 사이먼도 모른다고 하니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걱정은 접어두자. 설마 우리의 캐드펠 수사가 놓치는 게 있을까.
말을 타고 나갈 때 썼던 모자가 시체에는 없었다. 시체의 근처에서 찾은 모자에는 캐드펠 수사만이 알아차릴 게 있었으니 바로 허브였다. 그 허브가 어디서 자라는 곳을 찾으면서 캐드펠 수사의 추리는 급물살을 탄다. 놀랍게도 돔빌에는 여자가 있었고 어디를 가든 동행하고 만남을 지속했다. 오랜 만남의 주인공이 배신감에 돔빌을 죽였을까. 진실은 달랐다. 여자는 단 한 번도 돔빌을 사랑한 적이 없었고 그 밤의 만남을 끝으로 수녀가 된 상태였다. 유력한 용의자였던 여자도 범인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이베타의 외숙부까지 살해당한다.
『세인트자일스의 나환자』는 묘한 분위기의 나환자 라자루스의 정체와 범인이 밝혀지며 소설은 나름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마주하니 애처롭고 안타깝다. 부와 권력을 다 지녔지만 사랑은 얻을 수 없었던 돔빌, 오직 재산만이 전부였던 이베타의 외숙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인을 저지른 범인의 마지막은 처량하다. 흉악하고 추한 인간의 욕망 끝에는 파멸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