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 보여서 다행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주란 지음, 임수연 그림 / 마음산책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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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이별하며 산다. 시간과 이별하고 어제의 나와 이별한다. 이별은 다음을 위한 수순이다. 어제의 다음인 오늘, 새로운 나와의 만남을 기대한다. 시간이 흘러 지우고 싶었던 어제, 그때의 나와 재회할 때가 있다. 안쓰러운 나, 그러나 조금은 후련한 나. 그것은 나를 둘러싼 관계와도 마찬가지다. 좋았던 관계, 돌이킬 수 없는 관계, 제대로 정리를 하지 못한 관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손 내밀 수 있는 과거의 인연은 몇이나 될까. 이주란의 짧은 소설 『좋아 보여서 다행』 은 그런 관계를 돌아보게 한다.


13편의 짧은 이야기엔 만남과 헤어짐이 있다. 우연한 만남, 일부러 작정한 만남, 예고된 이별, 갑작스러운 이별, 영원한 이별까지. 어찌 보면 우리 삶에서 마주할 수 있는 흔하디흔한 관계들. 그 관계와 인연에는 저마다 설명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 어떤 인연은 이유도 모른 채 끊어지고 어떤 인연은 나중에야 이유를 알게 된다.


「1년 후」의 ‘나’는 헤어진 연인 ‘인우’의 부탁으로 3주 동안 반려견 ‘버트’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이게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을 일도 아니다. 인우를 만나는 게 아니라 반려견 버트를 만나는 것이니까. 자신만 빠져나왔을 뿐 1년 전과 똑같다. 버트를 산책시키고 장을 보며 지낸다. 3주가 지난 후 인우와의 관계가 명확하게 느껴진다. 이주란의 이번에도 이별의 원인에 대해 선명함을 배제한다. 흐릿하고 불투명하게 그려낸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관계도 그런 관계가 많다.


그럼에도 분명하게 이유를 찾고 싶은 이별이 있기 마련이다. 원만하게 잘 지냈다고 여기기에 답답한 마음이 크다. 「아주 긴 변명」속 ‘나’는 너와 함께 갔던 카페에서 너를 생각한다. 헤어짐의 발단이 된 하나의 사건을 돌아본다. 2년 전 나에게 했던 왜 그렇게 말했는지. 완전히 어긋나 돌이킬 수 없는 관계를 나는 회복하고 싶은 걸까. 아주 긴 변명이란 제목이 나의 것인지, 내가 듣고 싶은 너의 것인지 모르겠다.


꼭 하나만 물을 수 있다면 그래서 너는 어땠는지 묻고 싶어. 그날 왜 그랬는지가 아니라 그 후로 어땠는지를. 사실 네가 하고 싶은 말은 늘 그렇듯 이후의 일들일 테니까. 나는 그걸 들을 준비를 하고 여기 돌아왔어. 지금의 나는 그때 네 진심을 외면하면서까지 꽉 붙잡고 잃지 않으려던 것들을 결국 잃은 사람이 되어 있거든. (「아주 긴 변명」, 118쪽)





어떤 미련이나 후회를 안고 살아가는 이별이 있는가 하면 「봄의 신호」 속 ‘영수’처럼 영원한 이별을 겪는 이도 있다. 그리고 그를 걱정하고 위로하는 이들이 있다. ‘미소’도 그렇다. 아프고 아린 관계가 아니라 앞으로 단단해지고 어제가 아닌 내일을 같이 할 관계. 영수가 보여준 말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다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처럼.


다행히 지금도, 미소의 생각보다 눈앞의 영수는 좋아 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좋아 보여서 다행이죠? 영수가 물었고 미소는 정말 이 사람은 최고다! 정말 멋있어! 속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짧은 순간, 이렇게 많은 느낌표를 쓴 적이 있던가 하면서. (「봄의 신호」, 157쪽)


13편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좋았던 건 마지막 두 편 「산책로 끝에 가면」과 「숲」이었다. 「산책로 끝에 가면」 속 영실과 명자는 초등학교 동창이다. 지난겨울 우연히 둘은 만났다. 영실의 집 근처에 명자의 아들 가족이 산다. 명자가 아들 집에 들를 때마다 영실의 집에도 들른다. 영실과 명자 사이에 특별한 일은 없다. 영자의 청소 일이 끝나면 둘은 마트에 들러 집을 간다. 영실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명자는 묻지 않는다. 영실이 산책 끝에 명자나무 꽃을 본 이야기를 하며 명자에게 휴대폰 속 명자나무 사진을 보여준다. 명자는 영실 나무를 검색하고 영실 나무가 없지만 찔레나무 열매가 영실이라는 걸 알려준다. 명자와 영실의 관계는 과거가 아닌 현재의 관계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다고 할까.




「숲」의 ‘현경’과 ‘나’도 다르지 않다.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다. 그저 1년에 한 두 번 만나는 게 전부다. 그러나 현경에게는 뭐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비밀이나 속사정 같은 거 말이다. 아무렇지 않게 가끔 문자를 보낼 수 있는 관계, 호기심을 갖고 재촉하며 묻지 않고 기다려 줄 수 있는 사이. 나와 현경의 관계는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한 것이다.


조용히 우느라고 한참 답을 하지 못했더니 괜찮으냐고 묻기에 괜찮다고 했더니 다행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을 때. 그때 나는 내가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괜찮지 않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으니까. 그게 내가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고 그 뒤로 나는 안심하고 현경의 그림자와 함께 걸었다. (「숲」, 193쪽)





아무것도 묻지 않고 좋아 보여서 다행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는 건강한 관계다. 그런 관계는 안 좋아 보이는 데 괜찮아라고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안부를 묻는 문자가 반갑고 바로 답장을 보낼 수 있는 일, 그런 관계가 아닐까 싶다. 답을 보내지 않더라도 전화를 거는 대신 기다려줄 거라는 확신이 있는 관계. 이주란이 궁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다정한 사이다. 친절하고 상냥하지 않아도 쌀쌀하지 않은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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