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권여선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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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가 빠르면 편하다. 하지만 눈치가 느리다고 불편해할 일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 각자 행동의 속도가 다르듯 이해의 속도도 그렇다. 상대의 농담이나 유머에 즉각 반응하는 이가 있으면 한참 지나야 그 숨을 뜻을 알고 혼자 웃거나 나중에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삶의 속도는 왜 아니 그렇겠는가. 삶의 시차를 인정하는 순간 눈치 없음에 대해 불평할 일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건 의도를 파악하고 알아차리는 게 모두 똑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작가 권여선의 작품이 대상을 수상한 『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고 어떤 의도를 파악하는 일, 말하지 않은 말들과 숨겨진 뜻에 대해 생각한다. 차마 말하지 못하는 이의 사정이나 미뤄두어야 했을 말들에 대해서도. 대상 수상작인 권여선의 「사슴벌레식 문답」은 다시 읽어도 좋다. 아니 읽을수록 소설의 진위에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까지 든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내온 친구, 서로를 위한다고 여겼지만 결국 내 삶을 살기에 급급한 현실에 오해하고 상처 주는 일은 소설 속 네 명의 친구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30년 전 대학을 입학하면서 같은 하숙집을 시작으로 서로의 청춘을 응원하고 조언하며 지낸 그들. 한 친구의 생일을 맞아 떠난 여행지에서 민박집에 들어온 사슴벌레를 보며 나누던 대화는 ‘사슴벌레식 문답’이 되었다. 진로에 대한 고민, 방황과 좌절 때문인지 죽음을 선택한 한 친구의 20주기 추모 모임에 남은 셋 중 홀로 참석한 화자는 ‘사슴벌레식 문답’ 속에 숨겨진 의도를 생각한다. 시대가 바뀌고 지키고 싶었던 신념의 형태도 달라지고 점차 삶의 방향도 달라진다는 것을.


어디로든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속에는,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는 식의 무서운 강요와 칼 같은 차단이 숨어 있었다. 어떤 필연이든, 아무리 가슴 아픈 필연이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잔인한 간명이 ‘든’이라는 한 글자 속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 「사슴벌레식 문답」 중에서)


화자처럼 어떤 일은 뒤늦게 해답을 안겨준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어 같은 일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저마다 다르게 기억하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 오해가 쌓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친구를 배신하는 일이 생긴다. 그럼에도 그 시절 함께했던 순간은 맨 처음 나누던 ‘사슴벌레식 문답’의 그리움으로 남아있지 않을까.


기억의 내용은 동일해도 그 뉘앙스는 바뀐지 오래인데 말이다. 사슴벌레 문답처럼.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든 들어와.

어디로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나갈 수가 없어. 어디로든……

갇힌 기억 속의 내 옆에 쌍둥이처럼 갇힌 지금의 내가 웅크리고 있다. ( 「사슴벌레식 문답」 중에서)


사슴벌레식 문답을 아는 이를 만나면 반가울 것이고 좋아질 것이다. 그는 권여선의 이 단편을 읽었다는 것이니까. 처음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동안 혼잣말로 중얼거릴 것 같다. 어디로든 들어와? 어디로든 들어와.


최진영의 「썸머의 마술과학」 은 열여섯 언니 이봄과 아홉 살 동생 이여름의 시선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다. 봄과 여름이 화자가 되어 시를 쓰는 모임에 나가는 엄마와 해장을 위한 모임에 나가는 아빠. 아빠의 주식 투자로 생긴 빚 문제로 아파트를 두고 싸움을 하는 엄마 아빠를 피해 근처 할머니 댁에서 비공식 모임을 하는 자매. 자신을 여름이 아닌 썸머라 불러달라는 사랑스러운 썸머는 환경에 관심이 많다. 배우는 대로 흡수하고 실천하려는 어린이다. 지구와 미래를 걱정하는 썸머를 보고 있자니 어른인 나는 심히 부끄럽다. 그런 썸머를 보는 봄의 마음과 믿음을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것이다.


썸머를 생각하면 미래를 무한하게 긍정하고 싶다. 팬데믹, 미세먼지, 전염병, 홍수, 침수, 가뭄, 꺼지지 않는 산불, 식량난, 기후 난민, 토양오염, 해양오염, 종의 멸종처럼 암울한 일들로 가득한 미래가 아니라…… 탄소 중립 실현, 미세먼지 없는 대기, 자연 분해 가능한 플라스틱, 재생 에너지, 수소에너지, 전기자동차, 대체 식품 등으로 채워질 미래를 상상하고 싶다. 엄마 아빠에게는 낯설지만 우리에겐 당연해질 것들을 사람들이 계속 만들어낼 거라고 믿고 싶다. (「썸머의 마술과학」 중에서)


서유미의 「토요일 아침의 로건」 은 주말마다 스터디 룸에서 영어를 배우는 ‘로건’의 이야기다. 오십 대 남자인 그는 미국지사 발령을 목표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다. 목표에 가까이 왔다고 여긴 시점에 그는 뇌종양 진단을 받는다. 강사인 젤다에게 영어 공부를 그만두겠다고 말하려 하지만 4주 내내 말하지 못한다. 그건 가족에게도 마찬가지다. 장모님의 생신 모임에서는 오히려 미국 생활을 기대하고 있을 정도다. 마침내 젤다에게 의사를 전달했을 때에도 젤다 역시 축하할 일이라며 인사를 건넸다. 주말마다 마주한 풍경들, 한강공원의 모습들이 로건에겐 어떤 의미일까. 토요일마다 로건이었던 그는 김성호로 살아갈 것이다. 쓸쓸함이 가득 묻어난다. 소설의 마지막이 하나의 장면이 되어 박힌다.


카페 밖으로 나온 뒤 그는 잠시 문 앞에 서 있었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그를 지나 자전거도로로 나아갔다. 그는 헬멧과 선글라스를 쓴 사람들의 옆모습과 군더더기 없고 날렵한 뒷모습을 보았다. 무언가 그의 앞으로 계속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고 자신이 무엇을 선택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자 비로소 마음이 아팠다. ( 「토요일 아침의 로건」 중에서)


담담하고 차분한 슬픔은 ‘나’와 여덟 살 차이가 나는 큰이모의 딸 인주 언니 이야기를 그린 백수린의 「빛이 다가올 때」에서도 비슷하다. 시력을 잃은 큰이모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직업마저 큰이모가 바랐던 교수가 된 인주 언니가 대학생 때 과외를 받았다. 시간이 지나 간호사로 해외취업을 한 나는 교환교수로 뉴욕 온 인주 언니와 재회한다. 뉴욕에서 시간을 보내며 나는 인주 언니는 큰 존재였지만 자신처럼 누군가 좋아하며 설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마흔 넘은 인주 언니가 스무 살 갓 넘은 남자를 사랑하는 일, 언니의 감정을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여겼다. 인주 언니의 나이가 되어 과거 사춘기 시절 교생선생님을 사랑했던 자신처럼 인주 언니도 그럴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내 생각대로 감정을 판단했다는 미안함.


타인이 느꼈던 방식 그대로 세상을 느껴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얼마나 헛된가. 우리는 오직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대로만 느낄 뿐이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그렇다. ( 「빛이 다가올 때」 중에서)


의 감정과 의도를 알아차리는 일은 이처럼 어렵다. 눈치챘다고 해도 내가 느끼는 눈치와 상대가 느끼는 눈치가 같다는 보장은 없다. 나머지 세 편의 소설도 그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재난에 대비하는 과정을 그린 것 같지만 위기 상황에 대피소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의 어려움을 알아차리고 도와주는 최은미의 「그곳」, 비대면으로 진행되는 노동의 현실을 그려낸 구병모의 「있을 법한 모든 것」, 아내의 고통을 안다고 여긴 남편의 제안으로 시작된 요트 여행에서 요트 난파로 위험한 상황에 이르고 그 순간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는 손보미의 「끝없는 밤」.


상대의 모든 말과 행동을 눈치채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보통과 다른 어떤 표정이나 감정을 살피는 일은 필요할 것이다. 상대에게 바라는 것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말이 아닌 문자, 쉼표, 이모티콘에 담긴 표정을 읽는 일 어렵지만 노력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소설을 읽는 일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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