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 -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1
한정현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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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사라지면, 너에게로 갈게.” (186쪽)


한정현의 『마고』는 궁금한 소설이 아니었다. 단편을 읽은 기억은 있지만 한정현이 어떤 소설을 쓰고자 하는지, 그가 소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까 한정현의 산문 『환승 인간』을 읽기 전에는 말이다. 산문을 읽고 그의 장편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마고』를 만났다. 제목 『마고』는 한국 신화에서 여신, 거인신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마고를 뜻한다. 여신에 대한 이야기일까 싶었지만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란 부제를 보며 추리소설이 아닐까 살짝 기대했다.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추리소설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소설은 광복 직후 혼란스러운 한반도를 배경으로 윤박 교수의 살인 사건으로 시작된다. 미군정이 시작된 시대 범인은 미군이었다. 그러나 미군 입장에서는 그 사실은 밝혀져서는 안 되었고 다른 용의자가 필요했다. 사건 당인 윤박 교수와 같은 공간에 있었던 세 명의 여성이 용의자가 된다. 세 명의 용의자는 잡지 편집장 선주혜, 과거 식모였고 술집 여성이었지만 지금은 가정주부인 윤선자, 윤박 교수의 조교이자 신인 소설가 현초의는 안타깝게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종로경찰서의 검안서이자 '세 개의 달'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여성 탐정 연가성은 문화부 기자 권운서와 함께 사건에 연루된 세 명의 여성에 대해 추적한다. 가성과 운서는 오랜 친구 사이로 서로를 위해 전부를 내어줄 수 있는 사이다. 둘은 사건이 일어난 장소인 호텔 포엠의 사장 에리카를 만나 당시 상황과 세 명의 여성에 대해 묻는다.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에리카는 세 여성과 윤박 교수의 관계와 행적에 대해 애매모호하게 답한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유학을 다녀오고 대학 강의와 문단에서 권력을 행사했던 윤박 교수와 세 여성,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나씩 진실이 드러날수록 윤박 교수의 추악한 본성은 밝혀진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그들을 착취하고 협박한 사실이 세 여성에게 충분한 살인 동기가 된다. 세 명이 협공해서 윤박 교수를 죽였다 해도 무방할 정도다.


범인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소설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세 명의 여성을 비롯한 여성의 삶에 집중하면서도 일본이 사라지고 그들에게 충성했던 이들의 고스란히 미국을 향해 복종하는 역사의 모습도 조명한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축이 되는 가성과 운서의 사랑을 시작으로 동성과 이성으로 규정된 사랑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이야기다. 여성의 사랑이자 소수자의 사랑이며 미군정기의 지배와 폭력의 이야기, 시대에 저항하고 고발하는 모두의 이야기인 것이다. 폭격으로 인해 살아남을지조차 의문인 시대에 아이를 구하려는 여성의 모습.


“이곳에 만약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남자이고 좌익이거나 우익일 테죠. 여성과 아이와 노인의 목숨 따윈 안중에도 없겠죠. 이 조선 땅에서 저 순교 같은 거 안 합니다.” (129쪽)


나는 그 시대를 알지 못한다. 그건 한정현도 마찬가지다. 한정현의 소설을 통해 나는 조금이나마 그 시대를 상상하고 기록으로 남지 못한 삶을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정현이 소설에 대해 들려주는 작가의 말은 남다르게 다가온다.


작중 세 개의 달은 이 소설 속 세 명의 용의자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조금씩 모양이 변하며 종내는 하나의 원형을 만드는 달처럼 이 세계 속 모든 소수자, 약자들의 연대하는 얼굴이기를 바라며 써넣었다. 강렬한 태양에 맞서지는 못할지언정 늘 우리 곁에, 서로의 곁에 있는 그런 모습으로 말이다. (「작가의 말」, 211쪽)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는 뻔한 말로는 위로할 수 없는 이들의 사랑이자 삶이다. 여자로 태어났지만 남자로 살고 싶었던 가성과 반대로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자로 살고 싶었던 운서의 사랑은 시대가 바뀐 현재에도 흔쾌히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서로를 위하고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충분할 텐데. 우리에겐 여전히 연대와 공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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