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레퓨테이션: 명예 1~2 세트 - 전2권
세라 본 지음, 신솔잎 옮김 / 미디어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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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는 계단 가장 아래에 있었다. (15쪽)


소설의 첫 문장을 읽고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살인사건의 범인을 추적하는 소설이라고 추측할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는 범인일까, 목격자일까. 궁금증을 불러오는 이 소설은 넷플릭스 전 세계 1위 <아나토미 오브 스캔들>의 원작자 세라 본의 신간이다. 『레퓨테이션: 명예』 란 제목과 살인사건, 명예를 위해 살인사건의 진실을 밝힌다는 의미일까, 명예를 위해 진실 따위는 필요 없다는 뜻일까.


당당한 커리어 우먼을 상징하는 표지 속 인물, 소설 속 엠마 웹스터(이하 엠마)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노동당 하원의원으로 주목을 받는 정치인, 최근에는 여성 인권을 위해 ‘리벤지 포르노’ 법안을 통과시키며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성공한 여성 정치인의 실제는 달랐다. 온갖 협박과 악플에 시달려야 했다. 생명을 위협하는 악플과 살아가는 일상이란 어떨까, 감히 상상할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이혼 후 사춘기에 접어든 딸 플로라와 보내는 시간도 부족했다. 엠마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남편과 재혼한 캐럴라인과 더 가까이 지내는 것 같아 속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엠마는 하원의원이 되기 전 교사였다. 그때 동료였고 플로라의 음악 선생이었던 캐럴라인은 남편의 외도 상대였고 현재는 재혼한 상태다. 완벽한 정치인이자 엄마로 살고 싶지만 현실은 한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정치인의 삶이란, 기자와 협력해야 했고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과도 잘 지내야 했다. 지역구의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의 고충을 들으면서도 그들이 한순간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하는 삶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딘가에서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두려움, 여성 정치인의 삶은 험난 그 자체였다.


그런데 아이에게 일이 생겼다. 플로라가 왕따를 당하고 있었고 자신을 괴롭히는 레아의 나체 사진을 찍어 남학생에게 보낸 것이다. 자신을 돕고 협력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기자 마이크는 플로라의 기사를 쓰겠다고 말한다. 어제까지 동지이자 친구였던 남자가 적으로 돌변한 셈이다. 정치인이자 엄마인 엠마 웹스터는 이 위기를 어떻게든 넘겨야만 한다.


내 원칙을 지켜야 했다. 품격을 잃으면 도대체 내게 무엇이 남겠는가? 뻔뻔하게 나가야 한다. 단호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협조할 마음이 없다고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 (1권, 181쪽)


내 직업만 아니었다면 플로라의 행동은 가파른 곡선의 일부이자 대단히 유감스러운 10대의 비행, 한심한 실수쯤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내 명예 때문에 아이의 명예가 달린 문제가 타블로이드 신문에 기사화될 위험에 처한 것이다. (1권, 199쪽)


엠마를 향한 관심과 공격은 끊이지 않는데, 그녀가 사는 집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 시체는 바로 마이크였다. 엠마는 사건의 용의자가 된다. 그녀가 진짜 범인일까? 엠마가 두 명의 여성 의원과 함께 살고 있는 집에서 발견된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자체만으로도 여론은 엠마를 집중 공략했다. 기자였던 마이크가 왜 그곳에 왔는지, 살인사건의 실체보다 엠마와 마이크 둘 사이의 관계를 파고드는 선정적인 기사가 쏟아진다. 알려진 바로는 마이크는 엠마가 보낸 메시지, 그러니까 집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택시를 타고 그 집에 도착했다.


엠마의 주장은 달랐다. 마이크에게 문자를 보낸 적이 없고 집에 들어왔을 때 무단 침입을 한 그를 발견했고 나가라고 소리쳤으며 둘 사이의 다툼이 있었지만 그를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다. 두려고 무서운 마음에 정당방어로 그를 밀쳤을 뿐이다. 마이크가 플로라의 일을 언론에 보도하려고 온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증거는 엠마를 향하고 있었다. 마이크와 협력하던 사이가 아니라 좋은 감정을 갖고 밤을 보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고 말았다.


심지어 엠마는 처음에 거짓말을 했다. 열쇠 꾸러미로 얼굴을 가격하고 세라믹 그릇으로 마이크의 머리를 내리치고 증거를 버렸다는 것을 숨겼다. 부검 결과, 문자 메시지 내역, 주변의 증언으로 엠마는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집에서 만나자는 문자는 보낸 적이 없었다. 경찰에서도 그 부분은 인정했다.


치열한 법정 싸움이 시작된다. 한 편의 법정 드라마를 보는 듯 생생하게 그려낸다. 배심원을 앞에 두고 엠마가 마이크를 고의로 살인했다고 주장하는 왕립기소청과 우발적 살인이라는 변호사 톰. 자신을 걱정하는 플로라, 엠마를 응원하며 재판을 참관하는 캐럴라인. 재판에서 증인의 역할은 중요했다. 엠마에게 우호적인 증인과 그렇지 않은 증인, 그들의 증언이 사건에 미치는 영향은 컸다. 재판정에서 매번 팽팽하게 맞서지만 유죄 쪽으로 조금 더 가깝다. 고백하자면 나는 소설의 중간을 건너 뛰어 결말을 먼저 보고 싶은 욕구를 참느라 힘들었다.


누군가 엠마를 함정에 빠드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어쩌면 그러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여성 인권을 지지하는 정치인의 몰락을 바라지 않았으니까. 배심원의 판결이 무죄로 나왔을 때 내심 안도했다. 그러나 엠마의 본심을 알고 나니 혼란스러웠다. 무죄를 선고받고 나온 속내, 그러니까 정치인으로의 엠마의 마음 말이다.


밖으로 나오자, 나는 어느새 정치인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그 의심을 종식시키는 소감을 겸손한 태도로 전달해야 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열여섯 살짜리 남자아이를 생각하면서. (2권, 242쪽)


입을 떼며, 내게는 선택권이 있음을 깨달았다. 참회와 감사를 표하며, 거침없이 자기 의견을 말하는 여성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내게 가르쳐 준 공인의 삶에서 물러나겠다고 이야기를 할 것이냐, 아니면 반항적이지는 않되 더욱 굳건한 모습으로, 내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여성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힘쓰겠다고 말할 것이냐. (2권, 243쪽)


『레퓨테이션: 명예』는 이처럼 여성 정치인이 미디어에 노출되면서 겪게 되는 복잡한 심리를 아주 세밀하게 보여준다. 동시에 정치인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재미있게 술술 읽히지만 복잡한 심경을 마주하는 소설이다. 인간의 욕망과 야망이 얼마나 무서운지, 권력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말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영상화가 확정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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