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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장 쪽으로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보여지는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보여지지 않고 숨겨둔 그 어떤 것을 제대로 알아보기란 쉽지 않다.반대로 완연하게 드러나는게 전부이라고 진실되게 말하지만 이 진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도 없다.언제부턴가 또 다른 나를 만들고 이중적인 나로 살아가는지 나조차 알 수 없지만 본연의 나를 보이고 싶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 역시나 찰라의 짧은 시간임을 알게 되는게 산다는 것에 주어지는 선물이자 연륜이 아닐까 싶다. 그 연륜을 향해가는게 목표라면 너무 거창하지만 아무튼 그곳를 향해 살고 있는지 모른겠다.
사육장 쪽으로 라는 제목부터 평범치 않은 8편의 소설 모두 껍질을 깨고 본질을 드러내라는 암시를 주는 것 같았다.암울한 기운이랄까? 그 기운을 걷어내면 저 멀리서 떠오르는 새벽의 빛이 있을꺼라는 기대도 갖게한다.문학계의 주목받는 다른 신인작가의 소설과는 그 느낌이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겠다. 물론 기준은 내게 있음을 말해둔다.
소풍 - 오래된 연인인 남과 여는 오랫동안 꿈꿔온 여행을 떠나게 된다. 출발부터 그들을 만나는 건 짙은 안개뿐이다. 남자는 안개가 끼면 날씨가 맑아질꺼라 하지만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 오래된 연인이 지금 피걱꺼리고 있음을 암시한다.근교에서도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음을 알지만 여행이라는 이름은 항상 멀리 떠나야하고 또 좋은 데서 숙식을 해야한다는 의식을 심어준다. 출발부터 시작된 안개는 끝내 걷히지 않는다. 오래된 여인은 계속 부딪힌다. 서로를 배려하기엔 너무 멀리왔는지 모른다. 그들이 목적지를 가리키는 이정표앞에는 남과 여자는 함께 하지 못한다.
소풍이라는 제목으로 예상되는 즐거운 설렘은 어디에도 없다. 안개로 뒤 덮힌 것은 여자와 남자 사이의 괴리감을 나타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서로를 안다는 것은 보여지는 것만을 보고 안다는 얄팍한 것인지도 모르리라.
사육장 쪽으로 - 예쁜 전원주택단지,도시로 출근하기에 멀어도 근처에 개 사육장이 있는게 흠이지만 멀리 있으니 하며 주인공 나는 가족을 데리고 이사를 한다. 무엇에 이끌렸는지 빚을 내어 이 곳으로 이사왔는지 정확하게 말하지 못한다. 도시의 중심지에 도시인으로 살고 싶었지만 변두리에서 살아야만 했던 그것이 이유였을까? 사람들은 번듯한 도시인이고 싶어한다. 번듯한 집에 번듯한 차에 직장에 그 안에서 진실로 행복을 느끼며 사는지는 직접 그 속에 들어가봐야 알 것이다.
빚을 갚으라는 붉은 색의 독촉장은 누구에게나 형태는 다르지만 날아온다.
전원주택단지지만 그들의 모습은 성냥갑같은 아파트의 삶과 다르지 않다. 웃는 낯으로 인사를 할 뿐 속내를 드러내며 손을 내미는 이웃은 어디에도 없다.독촉장은 가족을 불안에 휩쓸리게 하고 판단을 흐리게 한다. 어디서 쏟아졌는지 모르는 험악한 개들이 아이를 물었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육장쪽에 있다는 병원을 찾아 헤메다가 결국은 그들에 떠나온 도시속으로 달려간다.그들이 원하던 삶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전원주택이라는 허상에 사육되고 있었던건 아닌가.
동물원의 탄생 - 도심속 동물원에서 늑대가 탈출하고 돔형태의 높은 새장속에 있던 새떼들도 사라지고 만다. 늑대와 새들은 도시를 혼란에 바뜨린다. 늑대를 보았다는 제보가 들어오고 늑대에 의해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도 많고 알지 못했던 구석진 더러운 곳에서 새들은 시체를 발견하기도 한다.세상은 늑대를 연상시키는 옷들이 유행이 되고 늑대를 잡는 명목으로 총을 소유하는 것도 자유로워진다. 사내는 드러나지 않는 사회 구성원이다. 어디에서도 부각을 나타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지하에 살고 사내의 고향도 저 깊은 시골이다. 사내는 늑대를 잡고 싶어졌다. 총을 구입하고 늑대를 찾아 나선다.총구에서 순식간에 뿜어져나간 총알은 이전까지의 사내의 삶에 찍는 요란한 종지부 같았다.82쪽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누구나 한자루의 총을 소유하고 싶을 것이다. 점점 모든게 늑대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늑대가 아닌 부랑자를 쏟고 마는 사내. 그러나 두려움은 어디에도 없다. 사내는 점점 늑대가 되어간다. 모두가 잡고 싶어하는 늑대는 무엇이었을까.내 안의 또 다른 나였을까?
밤의 공사는 읽어내기 참으로 힘든 소설이었는데 메마른 시선으로 시작되지만 과감함을 벗어나는 섬뜩함이 있다. 거대체구의 아내와 쥐를 키우는 아이. 방관자처럼 살고 있는 남편이 허물어져가는 담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간에게 나타날 수 있는 극단의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이 소설집에는 유독 동물들이 많이 나온다.사육되어지는 개,탈출인지 모르는 늑대와 새떼 ,사람을 이겨내려는 쥐,달리기 하는 코끼리,튀겨지는 닭.
동물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사회의 실상이고 실재였을까. 나는 누구로 살고 있을까.사육되어지는 개일까 달리기하는 코끼리일까. 어쩜 그 모두인지도 모르겠다.
찬찬히 다시 읽어보면 이 소설들은 근래 몇 년간의 사회를 보여주고 있다. 서울의 어디에선가 벙커가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기억한다. 동물원에서는 수시로 동물들이 뛰쳐나와 주변의 사람들을 위협하기도 한다.
금요일의 안부 인사나 분실물은 물과 기름처럼 살고 있는 이웃과 직장동료의 이야기를 냉소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다. 첫번째 기념일과 퍼레이드 점점 존재를 잃어가는(변화라고 사람들은 말할지도 모를) 사회구성원들의 허기진 모습을 이야기한다.
사육장 쪽으로라는 소설에서 겉으로 보여지는 세상과 만난다. 화려한 고층 빌딩숲에서 빛나는 불빛,깊은 속을 보여주지 않는 또같은 아파트,소리질러 화를 내고 싶지만 짐짓 웃고 있는 모습들, 깨트리고 싶은 세상을 깨트리지 못하는 우리를 만난다.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틀을 깨지 못하는 이상 우리는 이 세상에 이렇게 살게 될꺼라는 두려움이 드는 것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내가 존재하기 때문일까? 그래도 언제가는 미세한 틈을 발견하고 틀을 깨는 시도도 계속되고 나 역시도 틀을 깰 것이고 어슴푸레 드러나는 새벽도 보게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