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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트 키딩 ㅣ 마음산책 짧은 소설
정용준 지음, 이영리 그림 / 마음산책 / 2023년 7월
평점 :
일상을 잊고 싶을 때 선명한 기억을 지우고 싶을 때 나는 잠으로 도피했다. 자고 자도 또 잘 수 있었다. 머리가 멍해지고 잠에 취에 입맛이 사라질 때까지 잤다. 그러나 잠은 묘약이 아니었다. 무기력하게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는 방법이었다. 효과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잠들어 있는 동안 나는 내가 아닐 수 있었고 깨어나서도 다시 잠으로 도망갈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꿈을 꾸는 일은 좋지 않았다. 악몽이나 흉몽, 길몽을 따지기 전에 나는 꿈을 꾸는 게 싫었다. 끊어진 인연이 등장하는 꿈, 가족이나 지인이 무작위로 등장하는 이상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기분이 별로였다. 혹여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닐까,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정용준의 짧은 소설 『저스트 키딩』은 그런 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건 꿈이니까 괜찮아, 그런 의미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걸 알지만 잠시라도 현실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할까. 다른 내가 되어 도달하고 싶은 어떤 상상의 공간 같은 것, 꿈꿀 수 있는 미래, 잔혹하면서도 아름다운 동화, 소설이기에 맘껏 소리 지르고 화를 표출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고 그 모든 게 허용되어 후련해지는 느낌. 설령 그것이 한낱 망상이나 환상일지라도.
그러나 이야기의 시작이 마냥 허무맹랑한 게 아니라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서 마냥 농담이나 잠깐의 소동으로 치부할 수 없다. 세신사로 일하는 신 씨의 일상으로 시작하는 「돌멩이」 속 소년의 일도 그렇다. 평일에 목욕탕 온 소년을 주목하는 신 씨. 학교에 가야야 할 시간에 목욕탕에 온 아이에게 공짜로 때를 밀어주며 몸을 살핀다. 멍이 든 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신 씨의 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먹고사는 일에 급급해 학교 가기 싫다는 아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학교에 가지 말라고 했다면 좋았을 텐데, 후회가 될 뿐이다. 가방 가득 돌멩이를 채워 학교에 간 마음을, 창문을 깨고 자신을 괴롭혔던 아이의 머리를 내리쳤던 그 분노를 말이다. 아들을 전학시키고 적금을 깨고 이사를 했야 했다. 신 씨가 목욕탕에 온 아이에게 마사지 값에 대한 제안을 한다. 돌멩이를 들고 만 있으라고, 내리치지 말라고 했는데 소년은 유리창을 깼다. 소년의 행동은 옳지 않지만 나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소설에서라도 그렇게 할 수 있어서 시원했다. 목욕탕을 다시 찾은 아이가 신 씨에게 조폭이냐고 물었을 때 신 씨의 답변은 명확하게 아름답다.
“세신사. 씻을 세洗. 몸 신身. 몸을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사람.” (「돌멩이」, 31쪽)
거창하게 정의 구현을 가르치고 그것에 대해 말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어려움과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현실적인 방법도 필요하다. 그저 돌멩이를 들고만 있으라고 알려주는 어른도 있어야 할 세상이다. 더 나쁜 쪽으로 가지 않도록 도움을 주고 손을 내밀어 주는 어른은 「세상의 모든 바다」에서도 등장한다. 세상의 전부였던 엄마와 아빠를 차례로 잃고 혼자 남은 ‘소산’은 엄마와 아빠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엄마를 찾으러 떠난 아빠를 기다릴 뿐이다. 그런 소산에게 톨게이트 요금소 정산원은 요금소에 앉아 있으면 아빠를 제일 먼저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돌봄과 안정이 필요한 소산을 이용한 것이다. 톨게이트를 지나던 트럭 운전사 여성 주윤만이 소산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아빠를 찾으러 가자고, 먼바다로 가자고 말하며 함께 떠난다.
저는 세상의 모든 바다를 갈 수 있어요. 바다로 향하는 모든 톨게이트를 알고 있지요. 이 톨게이트를 지나 저 톨게이트를 통과하면 이 세상은 저 세상으로 변한답니다. (「세상의 모든 바다」, 142쪽)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시스템의 부재를 생각한다. 개인과 개인의 연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 사회적 울타리는 언제쯤 가능할까. 그런 기대를 품지 않는 사회에 익숙해지만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하는 힘을 키운다. 표제작 「저스트 리딩」속 인물 ‘모자’처럼 말이다. 그는 편의점에 들어가 직원에게 자신이 몇 시간 전에 물건을 훔쳤다고 말한다. 직원은 물건을 돌려주면 되지 않냐고 하지만 모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점장이 알면 귀찮아질 게 뻔한 직원은 모자와 잘 해결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 모자는 편의점에 있는 두 명의 남자가 강도라고 직원에게 알려준다.
모자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직원. 경찰이 출동하지만 강도가 아니라는 사실일 밝혀진다. 모자는 화가 난 직원을 도발하고 직원은 모자를 폭행한다. 합의를 위해 병원에 찾아간 직원은 모자가 자신의 유튜버 콘텐츠로 피해를 입은 사람의 지인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 모든 과정을 모자가 계획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통쾌하면서 마냥 산뜻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피해자의 삶이 회복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렇다. 그냥 장난이었다는 것으로 무마하는 가해자와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평생 그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증명해야 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닿을 수 없는 꿈을 좇는 사람, 그런 사람을 사랑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들려주는 「시간 도둑」, 애잔하고 자신은 과거를 지불해 얻은 영원한 꿈속에서 사는 삶이 행복하기만 한 게 아니라 얼마나 지루한가 보여주는 「너무 아름다운 날」, 유령이 나오는 펜션에서 생을 끝내려고 했다가 죽은 동생을 만나는 「브라운 펜션」 은 인간의 욕망과 죽음을 보여준다. 모든 게 꿈이라면 괜찮을까. 죽음이 있기에 생은 고귀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 속에서도 살아갈 이유를 찾는지 모른다.
한 마디 툭 내던졌을 때 누구 하나 상처받지 않고 모두가 유쾌할 때 농담은 빛이 난다. 정용준은 그걸 아는 작가인 것 같다. 그래서 단지 농담에 불과한 이야기가 아닌 농담에 담긴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는 것 같기도 하다.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하고 꿈속을 헤매는 것 같기도 하지만 결국 꿈에서 깨어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다고 할까. 그래서 조금은 우울하고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