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너는, 어느 계절에 죽고 싶어
홍선기 지음 / 모모 / 2023년 6월
평점 :
죽음을 말하는 이들의 진심은 그 반대라고 알고 있다. 그만큼 삶에 대한 간절함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것을 놓치고 만다. 그 내면에 얼마나 깊은 상실과 슬픔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곁을 지키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너는, 어느 계절에 죽고 싶어』 란 제목에서 알 수 없는 슬픔이 전해진다. 그러다 가만 생각한다. 특정한 날이 아니라 계절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어느 계절에 죽고 싶을까. 눈부신 봄, 내가 좋아하는 4월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 멈춘다.
소설 속 ‘케이시’는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 케이시에겐 죽음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다. 젊은 나이에 사업에 성공하고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영유하는 그에게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케이시가 주최한 파티에 우연히 참석하면서 그와 친구가 된 ‘가즈키’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 이른 나이에 은퇴한 케이시와 다르게 하루하루 직장에 다니는 평범한 가즈키는 그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소개팅을 주선하지만 케이시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가즈키는 데이트 앱으로 만난 ‘하즈네’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마다 케이시가 안타깝다.
소설은 케이시를 중심으로 가즈키, 하즈네의 일상을 들려준다. 케이시는 가즈키의 조언대로 데이트 앱을 가입하자 수많은 여성들의 관심을 받는다. 케이시는 그들과 만나지만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허무하게 만들었을까. 같은 보육원에서 지낸 카나에와 좋은 양부모에게 입양되었다. 케이시가 대학생이 되던 해 카나에는 죽었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죽기 전 카나에는 케이시에게 어느 계절에 죽고 싶냐고 물었다. 그 질문은 평생 케이시를 따라다닌 것이다.
삶을 소모하는데 의미를 두는 케이시는 사업을 할 때 모델이었던 '유메'를 만난다. 유메 역시 부족한 게 없어 보이지만 그녀에게도 상처가 있었다.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그들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한다. 이처럼 이소설에 등장하는 이들은 빛나는 젊음이 아닌 어딘가 모르게 결핍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현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일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소설이지만 한국의 젊은 세대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가즈키와 하즈네는 결혼을 약속하고 케이시에게도 사랑이 나타난다. 카나에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찾은 뉴욕에서 만난 료코였다. 료코의 모든 게 거짓이었지만 케이시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원하는 만큼 돈을 줄 정도로. 과연 그 사랑은 진짜였을까? 반려견 하루가 죽고 반려묘 미루가 사라지자 케이시는 모든 걸 끝내기도 마음먹는다.
언제까지 이런 상실을 되풀이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앞으로 얼마나 더 두 다리가 허공 위에 떠 있는 그 아찔한 느낌을 받으며, 온몸의 기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절망감을 겪어야 하는 걸까. 그만 반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게 부질없고 지겹다. 또다시 같은 슬픔을 겪는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 상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일이 오지 않게 하는 방법은, 스스로 상실되는 것뿐이다. (384쪽)
그러나 잔인한 운명은 케이시가 아닌 가즈키를 선택했다. 사랑하는 이와 결혼해서 아이가 태어날 날을 기다리면 하루하루 소중하게 살아가는 가즈키는 교통사고로 떠난다. 남겨진 하즈네는 슬픔이 아닌 비장하고 의연하게 삶을 나갈 준비를 한다. 케이시는 그녀를 통해 삶의 소중함을 발견한다.
아직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결핍과 상처는 무엇 하나 온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해소되지 않은 채 삶의 그림자로서 지겹도록 우리를 따라다니며 괴롭힐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인연에 대한 기대가 있고 지금보다 더 완성된 나를 향한 희망이 있다. 희망과 기대, 그것이 삶을 살아내는 진짜 계절이었다. 이제야 그것을 보기 시작한 나는 영혼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삶의 투지를 느꼈다. (398쪽)
삶의 가치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사랑조차 믿지 못하는 청춘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소설이다. 그러면서 삶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는 그 과정이 헛되지 않고 아름답다는 것, 그게 인생이라는 걸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