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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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어젯밤에 눈이 내렸다. 많은 양은 아니고 살포시 내려앉은 정도다. 겨울이니 눈이 오는 건 당연하지만 눈에 대한 감각은 저마다 다르다. 내게 눈은 어린 시절 사춘기의 치기로 시작된다.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그 즈음 그 시절을 벗어나고 싶었다. 마땅히 갈 곳도 없고 가출은 생각조차 못 했는데 눈이 내리던 겨울에는 이상하게 눈을 따라 어디론가 가고 떠날 수 있기를 바랐다. 어쩌면 그건 지금 그때의 나를 포장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십 대의 시골 촌 아이가 어디를 갈 수 있었을까. 용돈의 개념도 없이 그냥 학용품이 필요할 때마다 돈을 타 쓰던 아이. 엄마에게 참고서 가격을 부풀리는 대범함은 잃지 않았다. 혼이 난 기억은 많지 않으나 괜히 뾰로통해서 집 박을 서성이곤 했다.


막상스 페르민의 소설 『눈』 을 읽으면서 왜 과거의 나를 찾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의 부모는 내가 무엇이 되기를 바란 적이 없고 내가 되려는 것에 대해 반대한 기억도 없다. 시인이 되겠다는 유코에게 승려인 아버지는 시는 직업이 아니라고 말한다.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며 흘러가는 강물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유코의 재능은 뛰어났고 그는 시를 간절히 원했다. 그리고 시인의 생을 택했다.


눈은 시이다. 눈부신 흰빛의 시. (16쪽)


열일곱 소년이었던 유코에게 눈은 새로운 세상을 보여줬다. 그것은 시가 되었다. 시를 탐닉하던 그에게 세상은 단 하나의 시였다. 그 중심에 눈이 있었다. 그러니 겨울에만 시를 쓸 수 있었다. 그에 대한 소문은 퍼지고 원한다면 궁정시인이 될 수도 있었다. 유코는 7년 후에 왕을 뵙기로 한다. 유코는 천재였을지도 모른다. 눈을 바라보며 눈을 감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으니까.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눈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눈을 지닌 천재 소년. 그만의 감성은 모두를 감탄하게 했으니까. 그러니까 소설이 발표된 1999년이라면 이 아름다운 소설에 감탄했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나는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할 수가 없다.





눈은 현실의 더러움과 추함을 감추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이미지로 제격이다. 찰나의 아름다움, 어느 순간 사라지고 마는 환상의 빛, 백색이 주는 황홀감, 그것을 사랑의 순수로 연결 짓는 탁월함을 막상스 페르민는 알고 있었다. 미소년 유코를 통해 아름다움을 탐하는 인간의 욕망을 그는 잘 표현했다. 성장과 동시에 욕망의 크기에 따라 배움도 함께 커진다는 사실을. 


시에 색채를 더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유코 내면의 욕망을 일으켜 세웠고 동력으로 작동한다. 스승을 찾아 떠난 유코는 일본 알프스를 지날 때 눈 속의 한 여인을 마주한다. 수정처럼 투명한 관 속에 있던 죽은 여자. 눈 속에 갇힌 여자, 아름다움에 아름다움이 더해진 것이다. 영민한 독자는 알게 된다. 그 죽은 여인이 유코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말이다. 


유코가 만난 소세키 선생은 눈이 먼 장님이었다. 눈이 먼 사람이 색을 가르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빛은 내부에 있고 자신 속에 있다는 스승의 말은 너무도 당연하다. 파랑새가 바로 곁에 있다는 걸 모르고 평생 찾아다니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처럼. 유코는 스승의 예술이 단 하나의 사랑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유럽에서 온 줄타기 곡예사 여인 네에주(neige 눈)을 어떻게 만나 사랑했고 어떻게 잃게 되었는가를. 눈 속에 잃어버린 스승 소세키의 사랑을 제자인 유코가 찾게 되는 과정은 운명이라고 말해도 좋다. 눈으로 시작된 인연, 유코의 시에 이제 색채가 입혀질 것이다. 


“시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시쓰기라는 줄 위에 계속 머물러 있는 일일세. 삶의 매 순간을 꿈의 높이에서 사는 일, 상상의 줄에서 한순간도 내려오지 않는 일일세. 그런 언어의 곡예사가 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일세.” (100쪽)


눈(雪)이라는 아름다운 소설을 쓰기 위해 프랑스 작가는 일본의 하이쿠를 접목시킨 시도는 훌륭하다. 막상스 페르민는 결국 사랑이라는 걸 말하기 위해 시의 형식과 눈의 이미지를 데려왔다. 사랑은 눈처럼 아름다운 한 편의 시라는 걸 짧은 소설로 각인시키기에 충분하다. 사랑을 하는 건 시를 쓰는 것처럼 어렵고 영원한 사랑은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을 위험하고 위태로운 일이라는걸. 사랑과 시에 대한 정의는 각자 다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서로 사랑했다.

줄 위에 머물러 있었다.

눈으로 지어진. (124쪽)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만 오래 갇힐 수 있는 아름다움은 아니다. 내가 메마른 감성의 독자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십 대의 순수했던 소녀 감정을 불러오기에 지금의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시선으로 눈을 바라본다. 헤어 나올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 슬프다. 너무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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