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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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온한 삶을 위협하는 건 무엇일까. 예상하지 못했던 강력한 외부의 자극, 누구도 막지 못했을 사건 앞에서 인간은 무기력해진다. 내가 어찌해볼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뚫고 지나가야 할까. 호락호락하지 않은 삶은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두려운 건 내부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놓친다. 어쩌면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까 두렵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탄생 100주년 기념 소설집 『레이디스』에서 그런 우리의 내부를 만난다. 때로 불안을 숨기고 때로 아무렇지 않은 것 불안을 이겨내고 살아가고자 애쓰는 모습들. 16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내면을 가득 채운 초초한 기운이 어떤 형태로든 한순간 폭발하는 순간이 곧 올 거라는 예감과 마주한다. 해소될 수 있는 불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첫 번째로 만나는 단편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의 전설」에서 불안은 남자라고는 전혀 볼 수 없는 수녀원에 들어온 갓난 남자아이가 들어오면서 발생한다. 불안은 나를 알아가면서 시작된다. 그러니까 여자아이로 자라온 남자아이가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발생하는 분노와 불안이다.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자연적인 감정을 억압했을 때 어떤 결과를 야기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들의 불안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숨기려 한다. 상대에게 얕볼까 봐 초짜인 게 들통날까 봐 그렇다. 시골에서 대도시 뉴욕으로 이주한 「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속 가족이 느낀 불안은 지극히 정상적인 불안이다. 어른인 부모와 다르게 아파트의 냄새와 공기마저 불안으로 다가오는 아이의 감정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그것은 감추어할 것처럼 여겨진다. 직장을 구하는 일, 학교에서 친구들을 만나는 일의 공포는 가만 생각하면 우리 일상을 둘러싼 공포와 다르지 않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소설을 통해 전달하는 불안은 보통의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걸 알면서도 우리는 왜 불안에 잠식당하는 것일까. 


내일 새 학교에 가면 친구들을 아주 많이 사귀어서 거짓말을 보상해야 했다. 아이들이 전부 다 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 보다 두 배로 못되고 매정해도 어쩔 수 없다. 등을 토닥여주는 아빠의 손길이 느껴졌고, 자기 등 뒤에서 아빠도 허리를 구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상하다고, 엘스퍼스는 생각했다. 숨죽이고 있던 기나긴 일분 동안 엄마와 아빠는 둘 다 그렇게 조용할 수 없으리만큼 조용했다. (「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 141쪽)


물론 잠재적 범죄로 인한 공포와 불안에 대한 소설도 만날 수 있다. 남편의 폭언과 폭행을 피해 탈출을 감행한 「모빌 항구에 배들이 들어오면」의 아내가 도시의 놀이공원에서 우연하게 만난 사람이 동창이 아닌 나쁜 사람이라는 걸 인지하는 순간이나 어린 소녀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낯선 남자가 돌변하는 태도를 그린 「엄청나게 친절한 남자」는 범죄로 이어지기에 충분하다. 잔혹한 결말을 보여주지 않더라도 말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나처럼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어머니를 여읜 주인공이 보모로 들어간 집의 가족이 되고자 하는 「영웅」은 더욱 괴기하다. 위험에 처한 아이들을 구하면 모든 게 원하는 대로 이뤄질 거라 믿어 끝내 불을 지르는 모습은 불안이 몰고 온 처참한 결과를 보여준다. 일상을 가득 채운 불안은 두려움이 아닌 어떤 상상과 기대에서 시작되기도 하는데 가상을 남편을 만들어 그에 대한 상담을 받는 「애프턴 부인, 그대의 푸르른 산비탈에 둘러싸여」속 여자나 혼자만의 감정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청혼을 한 편지의 답장을 기다리는 「하늘로 막 비상하려는 새들」의 남자의 경우 말이다. 언제 답장을 받을까 불안하다 못해 남의 편지함까지 확인하는 이상한 행동으로 발전한다. 


이처럼 소설에서 불안을 느끼는 이들은 특별한 삶의 이력을 지닌 이들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때로 주변 이웃의 행동으로 인해 하루하루 평온하게 흐르는 일상이 흔들린다. 「돌고 도는 세상의 고요한 지점」속 아이를 데리고 공원에 나온 젊은 엄마가 마주친 연인의 모습 같은 것. 자신과 똑같이 아이를 데리고 나온 여자 앞에 나타난 남자. 둘 사이이 흐르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러나 이 단편에서 나를 흔든 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이런 문장이었다. 모든 것이 불안으로 둘러싸인 극도의 짧은 순간의 감정을 묘사한 문장. 어떤 미래가 도착할지 알지 못하면서도 연인 곁에서 고요를 순간 불안은 그들을 침범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곁에서 고요는 모든 고요와 다른 모든 종류의 평화를 뛰어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불현듯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으로 영원한 진실을 발견한 것처럼 방금 우연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 곁에서 백일몽의 아름다움은 절대로 알퍅하지 않고 고독하게 존재하는 그림처럼 움직임이 없지도 않으며 납작하지도 않다는 것을. 그녀 곁에는 전진하는 움직임이 없고 대기에 전류처럼 짜릿하게 흐르는 에너지가 있으면 현실이나 상상 속 사물의 둥근 자질, 온전한 자질이 있었기에. (「돌고 도는 세상의 고요한 지점」, 164쪽)


그래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소설집에서 보여준 미스터리, 강박, 집착에 매료된다. 어느 하나 비슷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은 16편의 이야기. 저마다 고유한 인간의 심연에 가득한 우울과 불안을 아름답게 묘사한다. 스릴 넘치고 긴박한 분위기, 복잡한 내면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들. 일상의 불안을 포집해 눈앞에 적나라하게 펼쳐놓은 놀랍고도 매력적인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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