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핑하는 정신 소설, 향
한은형 지음 / 작가정신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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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나쁘면, 하나가 좋다. 세상은 그렇게 시소처럼 양쪽으로 기울게 만들어져 있다고, 그렇게 만들어져 있지 않더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가려는 게 나라고. 가벼워졌다 무거워졌다, 다시 가벼워졌다가 하면서. 발이 땅에 닿았다 떨어졌다 다시 닿았다가 하면서, 또 한 번 날아오를 시간을 기다리면 되었다. (11~12쪽)


살다 보면 나만의 탈출구가 필요한 순간을 만난다. 삶이 주는 온갖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문 말이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그 문을 우리는 너무 늦게 발견하거나 끝내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직 나로 존재하는 순간, 내 의지로 행동할 수 있는 무언가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한은형의 장편소설 『서핑하는 정신』은 얼핏 제목만 봐서는 서핑에 대한 소설이 아닐까 싶지만 아니다. 자신의 의지로 열고 나갈 수 있는 그 문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서핑에 대한 소설이 아니라고도 말하긴 어렵다. 누군가에게 서핑은 그런 문이니까. 


주인공 제이는 하와이에서 태어나 열 살까지 살았지만 서핑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혼자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며 살고 있다. 직계가족이 없는 큰 이모의 유산으로 아파트가 하나 생겼다. 양양이 아파트. 크리스마스와 연말에 아파트를 처분할까 싶은 마음에 양양의 아파트를 찾았다. 그때까지 제이에게 서핑은 그저 바라보는 것이었다. 모두가 분주하고 약속으로 가득한 크리스마스 시즌에 누가 서핑을 하겠는가. 우연히 들어간 술집에서 옆자리의 대화를 듣다가 ‘와이키키 하우스’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서핑 강습을 신청하게 된다.


놀랍게도 강습을 신청한 사람들은 또 있었다. 제이까지 다섯 명이 모였다. 어제 술집에서 만난 양미가 가게를 운영하고 서핑을 강습했다. 모두 서핑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 그러니까 한 번도 서핑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양미의 강습은 이론부터 시작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제부터 본격적인 서핑 소설일까 기대할 수도 있다. 그렇긴 하다. 양양 바다를 앞에 두고 서핑에 대해서, 서핑의 용어에 대해 설명한다. 고요해 보이지만 무서운 양양의 바다에 대해, 파도에 대해. 차가운 겨울 바다 위에 보드에 올라타려는 이들의 모습을 상상한다.


제이를 포함한 수강생의 면면도 흥미롭다. 닉네임으로 대화를 나눈다. 양양 맥주를 만들고 싶은 남자 돌고래, 시간 강사로 서핑을 연구하는 남자 해파리, 금테 안경을 쓴 남자 상어, 쇼핑몰을 하다 망한 우뭇가사리, 제이는 미역. 무엇이 그들을 이 바다로 불러 모았을까. 그들은 서핑을 배우는 짧은 기간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고 급격하게 가까워진다. 서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소설을 통해 서핑에 대해 관심이 생긴 건 사실이다. 특히 어른들의 캠프파이어라고 설명하는 에고서핑 부분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자아를 서핑하는 시간, 뭔가 숙연해진다고 할까. 양미의 말처럼 내가 생각하는 나에 대해서 알아보고 나 스스로 알아보는 시간, 우리는 그런 시간을 갖은 적이 있었던가.


화자인 제이는 속엣말을 꺼내지 않는 사람이다. 직장에서도 누군가 만나는 관계에서도 그저 듣기만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에고서핑을 하는 동안에도 제이는 말하는 것보다 듣는 쪽이다. 서핑이 아니라면 만나지 않을 사람들과 고민을 나누는 시간, 서로를 가만히 위로하는 시간, 혼자인 동시에 함께인 시간. 서핑을 통해 모였지만 정작 중요한 서핑이 아니라 가만히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나를 들여다보는 게 행복했다. 


보통 사람이 보통의 삶을 살면서 보통의 서핑을 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나는 보통의 사람이므로. 보통의 삶을 살기 위해 보통 이상으로 애쓰고 보통 이상으로 힘들어하고 보통 이상으로 출근하기 싫어하는 보통의 사람. 보통으로 단순하고 보통으로 고뇌하고 보통으로 기뻐하고 보통 이하로 슬퍼하고 보통 이상으로 사랑을 느끼는. (233쪽)


소설은 담담하게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며 혼자 다스리던 제이의 내면이 서핑으로 인해 어떻게 변화하는지 섬세하게 보여준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단톡방에서 대화를 나누고 서핑에 대한 책을 읽고 직장과 일상에서도 서핑을 생각하는 제이. 제이의 가슴속으로 서핑이 들어왔다고 할까. 파도를 잡고 타는 일은 바닷가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니까. 도시의 서핑, 우리 인생에서 파도는 어디서든 만나고 자신 있게 타고 일어설 용기가 필요하니까. 


위대한 게 뭔데?

지지 않는 거.

뭐에 지지 않는?

자기에게 지지 않는 거.

내일의 해가 뜨면 내일이 서핑을 하는 거지.

오늘의 파도에서는 오늘의 서핑을 하고. (274쪽)


누군가 이 책을 시작으로 서핑을 시작할지도 모른다. 서핑을 시작하지 않더라도 양양 바다를 찾을 않을까. 서핑을 몰랐던 나도 무섭고 차가운 파도가 아니라 따뜻하고 다정한 파도를 타는 근사한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서핑을 소재로 한 따뜻하고 포근한 소설이다. 조금이나마 내 안의 나를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할까. 서핑을 통해서만 나를 알고, 나를 알아가는 건 아니다. 제이에게 서핑이 그러했듯 저마다의 서핑이 있을 것이다. 서핑하는 정신은 ‘자유를 찾으려는 적극적인 몸부림’( 307쪽)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자유를 찾으려는 행동만 있다면 삶은 매 순간 벅찰 것이다. 나만의 문을 열고 언제든 자유롭게 나갈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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