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놀라워라 박노해 사진에세이 5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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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절절 설명을 덧붙일 여유도 없이 삶은 그 자체로 고단하고 피곤하다. 무엇에 쫓겨 사는지 모르겠다. 무엇을 향해 나가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은 무겁고 어둡다. 어디론가 도망갈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나의 마음에 호통을 치는 글과 사진들. 박노해 시인의 사진 에세이 『아이들은 놀라워라』 속 아이들의 모습이다. 


책 전체에 담긴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자 수호천사’란 메시지가 나의 가슴에 꽂힌다. 무슨 불평이 많냐고, 변명 따위 집어치우라고 말이다. 37점 흑백사진과 글이 주는 울림이 켜켜이 쌓인다. 아이라는 신비로운 존재에 대해 우리 어른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 거대한 우주를 우리가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전해진다.


아이는 부모라는 지구 인간의 몸을 타고 여기 왔으나 온 우주를 힘껏 머금은 장엄한 존재이다. 아무도 모른다. 이 아이가 누구이고, 왜 이곳에 왔고, 그 무엇이 되어 어디로 나아갈지. 지금 작고 갓난해도 영원으로부터 온 아이는 이미 다 가지고 여기 왔으니. (10쪽, 「서문」 중에서)


박노해 시인이 지난 20여 년간 만나온 아이들, 지금은 어떻게 성장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웃고 가난한 일상에서도 감사의 마음을 잃지 않는 아들의 표정 속에서 기쁨의 빛이 쏟아진다. 나는 알지 못하는 그 삶에 내가 잠시 들어갈 수 있도록 이끄는 아이들의 환한 미소. 


어른의 부재를 홀로 감당하며 아빠에게 물려받은 낡은 손목시계를 차고 길을 떠나는 소년, 감자를 수확하고 벼 타작을 돕는 아이들, 일을 하러 간 어른들 대신 울며 보채는 동생을 등에 업은 어린 소녀의 모습에서 우리의 과거를 보고 그 과거가 만든 현재를 생각한다. 점령당한 분쟁의 땅에서 아이들은 여전히 자라고 여전히 꿈꾼다. 포기와 절망이 아닌 현재를 사랑하며 책을 읽는 소년의 모습이 아름답다. 


그래도 양 떼는 풀을 뜯고 아이들은 책을 읽는다. 비록 내일이면 여린 손에 작은 돌멩이를 쥐고 침략자의 탱크를 향해 달려갈지라도. (32쪽, 「헤브론 광야의 소년들」중에서)





모든 어른은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분쟁의 중심엔 아이가 아닌 어른이 있을 터. 그 현실이 답답하고 화가 난다. 어른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며 의지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애처로우면서도 기특하다. 모든 게 풍요롭다 못해 넘치고 버려지는 시대에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아래의 연필을 쥔 흑백 사진은 어떤 느낌일까. 어쩌면 아이는 진짜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지도에서도 찾을 수 없는 부족 마을의 전통 의상을 입은 소녀의 반짝이는 눈빛에 담긴 결의를 응원한다. 


배움은 간절함이다. 결핍과 결여만이 줄 수 있는 간절함이다. 그 간절함이 궁리와 창의, 도전과 분투, 견디는 힘과 강인한 삶의 의지를 불어넣는다. 우리가 아이들에게서 빼앗아버린 것은 그 소중한 ‘결여’와 ‘여백’이 아닌가. 간절한 마음에 빛과 힘이 온다. (62쪽, 「간절한 눈빛으로」 중에서)





무엇이 부족해 어른들은 전쟁을 놓지 못하는가. 전시 상황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아이들은 어떤 마음일까. 이스라엘 전폭기 집중 폭격으로 파괴된 마을, 마을 축제를 위해 연극 연습을 하던 아이들이 폭력으로 숨졌다. 비통하고 애통한 심정을 노래로 달래는 사진 속 아이들에게 미안함을 감출 수 없다. 


친구들이 죽은 자리에 꽃을 들고 서서 참아온 슬픔을 터뜨리며 노래를 부른다. 보아주고 들어주는 건 나 한 사람뿐인데 아이들은 우리 폭탄 대신 꽃을 손에 들자고, 세계를 향해 평화 시위를 하는 것만 같다. (74쪽, 「폭탄 대신 꽃을」 중에서)





어린이였던 시절, 그때의 모든 기억을 다 간직할 수 없겠지만 전쟁은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린이였는데 어른이 되는 순간 어린이의 감정을 잃어버린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천진함, 어떤 상황에서도 놀이를 찾고 친구와 어울리는 다정함. 정말 아이들은 놀라고 대단하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당연한 사실을 설렘으로 기대하는 어른은 몇이나 될까. 그저 지긋지긋한 추위가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솔직한 심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땅에서는 어떤 시간에서는 봄은 그냥 봄이 아닌 희망과 평화의 봄이라는 걸 이제 안다.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눈 속에 싹트는 작은 새싹 하나라도 먼저 보고 언 강 아래로 흐르는 봄의 물소리를 먼저 듣고 종알종알 속삭이고 노래하며 봄을 찾아 나선다. 아이들은 봄이다. 그 자체로 봄이다. 설원에 어깨 걸고 선 쿠르드 아이들이 이 분쟁의 땅에서 간절히 평화의 봄을 부른다. (86쪽, 「봄을 기다리며」중에서 )





가장 먼저 울고 가장 먼저 웃고 

가장 연약하고 가장 강인하고 

자신들만의 길을 찾아서 거침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버리는 아이들은, 

아이들은 놀라워라. 


아이들은 시대의 전위여라. 

아이들은 인간의 희망이어라. 

아이들은 어둠 속 빛이어라. (111쪽, 「아이들은 놀라워라」 중에서)


37점의 사진 속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여준다. 감추거나 숨기려는 마음은 찾을 수 없다. 낯선 이방인이었을 박노해 시인이 내민 손을 가만히 잡았을 것이다. 그 손을 잡아준 아이들 덕분에 우리는 이 귀하고 아름다운 사진을 볼 수 있다. 복잡하고 어두운 내 마음을 단순하고 환하게 만들어준 고마운 아이들, 당신에게도 빛을 전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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