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조가 놓인 방 소설, 향
이승우 지음 / 작가정신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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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는 순간 세상은 두 사람만 사는 공간이 된다. 그들이 어디 있든 마찬가지다. 연인들은 최초의 하늘과 땅을 가진 에덴의 연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세상에 단 두 사람만이 거주하는 양 느끼고 말하고 행동한다. 연인 이외 모든 사람들은 그저 배경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연인은 연인 말고는 다른 누구도 의식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사랑은 세상을 축소시키는 기술이다. 사랑에 빠지는 사람의 세계는 두 사람만 존재하는, 아주 좁은, 이제 막 태어난 세상이다. (42~43쪽)


사랑을 말하는 일은 어렵다. 그것은 삶과 마찬가지로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과 당신의 사랑이 같을 수 없고 설령 같다 해도 그 사랑의 지속 유무에 따라 사랑은 달라진다. 서로를 사랑한다고 해도 사랑의 방식은 같을 수 없고 그로 인해 철옹성 같았던 사랑은 금세 모래성처럼 허물어진다.


어쩌면 사랑의 약속이나 사랑의 언약 같은 건 처음부터 지켜질 수 없는 것들인지도 모른다. 사랑에 대한 담론, 사랑에 대한 정의 혹은 그저 사랑일까 싶은 사랑 이야기를 생각한다. 이승우의 소설 『욕조가 놓은 방』에 대해서 말이다. 소설은 분명 사랑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등장하고 그들은 분명 서로 끌렸고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잠깐 짚어야 할 게 있다. 그는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했던가, 아니다. 그저 스스로가 확신을 가졌을 뿐이다. 이국의 출장길에서 우연한 만남이 그에게 믿음을 주었다. 신비로운 마야인이 만든 피라미드에서의 만남과 충동적인 키스. 그것은 사랑의 시작이었을까?


남자에겐 아내가 있다. 결혼생활은 원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이별의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다. H 시로의 파견, 아내는 함께 갈 수 없다고 했다. 오히려 남자는 안도했다. 그리고 떠오른 그녀. 그녀가 H 시에 살고 있다는 건 운명일까. 이 역시 남자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그렇게 어이없는 확신을 안겨주니까.


그녀는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에겐 그는 사랑이라 할 수 없으니까. 그럼에도 그에게 빈 방을 내준다. 그녀가 그를 받아들인 건 사랑일까. 그럴 수 없다. 두 해 전 비행기 사고로 남편과 아들을 잃은 그녀에게 사랑은 사라졌다. 그녀가 원하는 건 사라지는 일. 따뜻한 물속으로 걸어가 멀리 옮겨지는 일. 방에 놓인 욕조의 물속에서 그녀가 편안을 느끼는 이유이다.


그의 욕망은 그녀를 원하고 향하지만 발현되지 못하고 사그라든다. 자신의 집으로 그를 이끈 건 그녀였지만 그녀를 떠난다. 그를 힘들게 하는 건 물소리였다. 그녀가 편안함을 느끼는 물, 욕조가 놓은 방은 그를 불편하고 힘들게 했다. 그는 그녀를 통해 아내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결혼 후에도 C 시를 찾는 아내. 처가 때문이 아니란 걸 알았다. 아픈 K를 만나러 가는 사실을 그는 묵인했다. K의 죽음을 그에게 전하는 아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와 그녀 사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마야 유적지 욱스말에서의 찰나의 순간을 그는 운명이라 믿고 싶었을까. 그것이 두 번째였고 H 시에게 만남까지 이어졌으니까. 그녀의 집에서 나온 후 다시 그녀의 집으로 향하기까지 그는 생각한다. 확실한 이유를 찾기 위해, 스스로를 납득시킬 이유가 있어야 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의 집에 남겨진 그의 물건을 찾으러 가라는 그녀의 연락이 없었더라면 그는 움직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없었다. 덩그러니 욕조만 놓여 있었다. 그는 그녀처럼 욕조에 들어간다.


당신은 아늑했고 편안했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몸이 허물처럼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잠들었다가 다시 눈을 뜨고 일어나면 전혀 다른 삶이 당신을 위해 준비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당신이,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의식의 안쪽, 또는 욕망의 밑바닥에서, 거의 언제나 너무나 간절히 소망해 온 것이었다. 지금과는 다른 삶. 당신은 그녀만이 아니라 아내도 이해할 수 있을 듯싶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 수도 있고, 착각이라고 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119쪽)


이승우의 소설 『욕조가 놓은 방』은 작가의 『사랑의 생애』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발표 순으로는 『욕조가 놓은 방』이 먼저지만 두 소설을 읽는 순서는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내게는 『사랑의 생애』를 먼저 읽은 게 다행으로 여겨진다. 『욕조가 놓은 방』은 『사랑의 생애』에 비해 아주 짧은 분량이지만 그 안에 담긴 사랑의 형체나 질감은 모호하여 실체를 확인하기 어렵다. 마치 사랑이 그렇지 않냐는 듯.


달빛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일렁이고 있었으니까. 바다 위에서 일렁이던 달빛. 물의 속살을 탐하고 스미고 희롱하던 그 흰 달빛. 걸어오라고, 들어오라고 손짓하며 팔을 잡아당기던 그 너무 차가운 흰 달빛. 당신은 그 달빛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일렁이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달빛이 우리 안으로 들어왔어요. 그러니까 우리 안으로 길이 난 거지요. (34쪽)


『사랑의 생애』가 그러했듯 사랑을 탐미하는 이승우의 문장에 사로잡힌다. 관능적이면서도 몽환적인 묘사, 물이 주는 이미지가 그러하다. 욕조가 놓은 방으로 우리를 이끌어 물속으로 천천히 발을 내딛게 만든다. 사랑인 줄 모르고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고 그저 사랑만 믿고 나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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