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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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순간 죽음과 대치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어떨까? 최선을 다해 방어하면서도 어느 순간 모든 걸 포기하고 죽음을 기다리게 될지도 모른다. 살 수 있다는 희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 생에 찾아오는 고비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본능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2002년 부커상 수상작으로 영화로도 유명한 안 마텔의 장편소설 『파이 이야기』는 인생이라는 경이로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어떤 순간이든 생은 이어지고 고난과 역경은 지나간다는 뻔하면서도 훌륭한 진리라고 할까. 하지만 누구도 그런 생을 원하지 않는다. 무탈하고 평범한 생이 우리 앞에 펼쳐지기를 바란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열여섯 소년 파이가 경험한 태평양에서 보낸 227일의 시간은 위대하고 장엄하다.


이미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에 대해 말하는 건 어렵다. 2022년 현재라는 시점에서 뭔가 남다르게 다가오는 건 우리도 어쩌면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 혼자 남겨진 파이와 다를 게 없다는 걸 느끼고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책을 좋아하는 어머니, 운동을 잘하는 형과 호기심 많은 파이에게 인생은 두려울 게 없고 아름답다. 동물원에서 함께 지내는 동물에 대한 이해와 아버지로부터 그것들에 대해 배우는 건 좋았다. 특별히 나쁜 건 없었다. 신에 대한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파이에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모두가 좋았고 세레를 받고 기도를 하면 충분했다. 열여섯 소년에게 인생에 대한 걱정은 필요 없었다.


캐나다로 이민을 결정하고 인도를 떠나는 일도 기대가 더 컸다. 가족과 동물을 실은 화물선이 침몰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돌발적인 사건으로 채워지는 게 인생이라는 걸 파이는 알지 못했다. 구명보트에 가족이 아닌 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 벵골 호랑이와 남겨질 줄 몰랐다. 가장 무서운 건 리처드 파커란 이름의 호랑이였다. 네 마리의 동물과 소년을 태운 구명보트의 운명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곧 그들이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거라는 사실 말이다.


그러나 파이는 달랐다. 동물원에서 동물과 지냈지 않았던가. 동물의 습성을 알았고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모두 끝까지 갈 수는 없었다. 자연의 섭리이듯 마지막엔 리처드 파커와 파이만 남았다. 파이는 리처드 파커를 조종해야 했다. 파이가 그의 주인이라는 걸 말이다. 구명보트에서 찾은 구호품과 생존을 위한 안내서를 따라 생활한다. 리처드 파커와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다. 방수포 아래에 자리를 잡은 파커와 뗏목과 구명보트를 오가며 지낸다. 태양을 이용해 바닷물을 증류하고 낚시로 물고기를 잡고 227일을 버틴다. 눈앞에는 호랑이가 있고 바다에는 상어떼가 있고 위협적인 파도가 있다. 감히 상상할 수 있을까? 구두 조각을 미끼로 물고기 낚시를 시작했던 어설픈 소년이 맨손으로 날치와 상어를 잡고 바다거북이를 해체하며 온몸으로 견디는 시간들.


우리는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운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싸우고, 빼앗기며, 성공의 불확실성도 받아들인다.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 그것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놓아버리지 않는 것은 타고난 것이다. 그것은 생에 대한 허기로 뭉쳐진 아둔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219쪽)


낚시를 하는 장면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떠올리게 만든다. 삶과 죽음이 대치하는 순간, 절실하게 바라는 그 무언가를 버리지 않은 간절한 몸짓. 바다 한가운데서 맞이하는 아침과 저녁, 그리고 밤. 그를 둘러싼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과 생각들은 철학적 사유, 그 자체다. 파이의 입장을 잠시 잊고 그가 느끼는 고독과 풍경을 상상한다. 절대 고독의 순간이지만 안 마텔은 놀랍도록 섬세하고 아름답게 묘사한다.


당신은 한 원의 중심이며, 당신 위에서 두 개의 반대되는 원이 휘휘 돌아간다. 군중 같은 태양에 시달린다. 군중이 시끄럽게 밀려들면 당신은 귀를 막아버리고 싶다. 눈을 감고 싶고, 숨고 싶다. 외로움을 조용히 일깨워주는 달에 당신은 시달린다. 당신은 외로움에서 벗어나려고 눈을 크게 뜬다. 고개를 들면, 때로 태양의 폭풍 중심에서, 고요의 바다 한가운데서 누군가 당신처럼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지 않을까 궁금해진다. 그 사람도 점에 갇혀서, 두려움과 분노, 광기, 무력감, 냉담으로 발버둥 치고 있을까. (312쪽)


호랑이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들.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는 순간 호랑이와 소년은 서로에게 가장 큰 위로이자 힘이다.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의지하는 친구이자 한 몸 같은 존재. 그러나 호랑이와 227일을 보냈다는 생존자 파이의 이야기를 누가 믿겠는가. 정작 어디에서도 호랑이의 모습은 볼 수 없었고 소년의 망상이라 여길 수밖에.


“세상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안 그래요?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 붙이지요.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 (433쪽)


생은 어느 순간 기적을 만들기도 한다. 그 시작은 인간의 믿음에서 기인한다. 파이 이야기는 그런 기적과 믿음의 완성체라 할 수 있다. 절망과 고통이 아닌 소망과 희망을 선택하고 품는 일.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가장 소중한 기도가 아닐는지. 지금 어디선가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하는 수많은 파이에게 이 소설이 하나의 기도가 될 것이다. 앞으로 끊임없이 이어질 우리 인생의 파이(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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