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시대 - 문보영 에세이 매일과 영원 1
문보영 지음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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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무거나 쓰다 보면 어느 날 그 글은 소설이 되기도, 시가 되기도 한다. 일기는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일기가 집이라면 소설이나 시는 방이다. 일기라는 집에 살면 언제든 소설이라는 방으로, 시라는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34쪽)


문보영처럼 아무거나 써도 잘 쓸 수 있다면 좋겠다. 이 글에는 그런 바람이 담겼다. 그러니까 문보영의 에세이 『일기시대』 에 대한 리뷰나 글이 아니라 그냥 내가 쓰고 싶은 마음을 쓴 글 정도가 되겠다. 일기쓰기에 진심인 글이라고 할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를 따라하게 된다.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문보영은 아주 어렸을 때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랬다고 한다. 친구가 하는 걸 모방했는데 심지어 손가락을 다친 모습으로 수학 문제를 푸는 것까지 따라 했다고. 그래서 수학 성적이 올랐다고 한다. 이런 순수하고 긍정적인 모방은 꽤 괜찮아 보인다. 이 책은 거의 절반 이상이 문보영의 방 형태에 대한 그림과 불면증으로 잠들지 못하는 시간에 그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뭐 그러니까 일기시대가 영 틀린 건 아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을 떠올리면 우리는 불면의 괴로움과 고통이 따라온다. 문보영의 동선은 그날그날 다른데 침대에 있다가 책상으로 바닥으로 때로는 옷장으로 때로는 거실의 소파로. 책상 서랍에서 라면을 꺼내 끓여 먹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게임을 하기도 하고 온몸으로 잠들기를 고대하면서 결국엔 아침 6시에나 잠든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이 그녀의 일기다.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그녀의 친구들과 편의점에 가거나 산책을 한 일, 영화를 본 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각한 것들이다. 누구나 경험하는 보통의 일상이지만 문보영만의 뭔가가 있다. 나는 그게 부럽다. 그게 무엇일까, 그걸 또 정확하게 모르겠으니 답답하다. 어떤 형식이나 제도에 구해 받지 않고 쓰는 당당함이라고 할까. 아닐지도 모르겠다. 애착 인형과 상상친구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나 그들과 꾸준하게 대화하는 상상력의 힘이라고 하면 맞을까.


대학시절 우연하게 듣게 된 시인의 수업 덕분에 시를 배우고 시를 쓰게 된 이야기는 정말 드라마 같다. 수업을 듣고 소설에 흥미가 생겼던 그는 선생님께 메일을 보냈는데 시인이라서 소설을 안 가르친다는 답을 받았고 종각에서 어르신 대상으로 시 수업을 한다고. 어른들의 시 창작 수업에서 문보영은 시를 일고 시를 배운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시는 학교 문학회로 이어졌고 그는 시인이 되었다.


시를 읽고 쓰는 순간에만 숨을 쉬고 슬픔을 잊을 수 있었다. 시를 읽는 순간에만 슬픔은 강렬하고 시원하게 느낌으로써 슬픔을 소화했다. 그게 무엇이건 간에, 어떤 것에서, 큰 도움을 받고 나면 그것은 큰 안목을 준다. 시에 큰 도움을 받은 이후에는 더 많은 시를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그런 시간을 한번 통과하자 아플 때만 시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무탈할 때도 시를 읽는 사람이 되었다. 시를 내 삶에 심어 버린 것이다. (96쪽)


아무거나 아무렇지 않게 쓰지만 그 안에는 멋진 비유가 있고 사유가 있다. 친구(친구의 닉네임이 참 기발하다. 이제 책에서 등장할 때 지난 책에서 만났기에 반갑고 심지어 내가 아는 이들 같다)와 같이 운전면허 시험을 보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그런 비유는 등장한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 켜는 법을 배우는데 강사는 시동을 켤 때 키를 너무 오래 잡고 있으면 엔진이 타버린다고. 문보영은 누군가와 손을 오래 잡고 있던 장면이 떠올라 사람의 손도 너무 오래 잡고 있으면 둘 중 하나가 타 버리기도 한다며 관계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간다. 손을 잡는 것은 관계에 시동을 행위라고. 운전을 못하기에 내가 시동을 걸 일은 없지만 차에 탈 때마다 누군가의 손을 잡는 일에 대해 생각할 것 같다. 그나저나 책에서는 운전면허를 타지 못했는데 그 결과가 궁금하다.


다채로운 이야기가 가득한 책이다. 하나같이 재밌고 흥미롭지만 문보영이 밤에 시를 들려주는 이벤트에서 독자에게 한 말처럼 우리가 잠든 사이에 잠들지 못하는 그를 생각하면 안타깝고 안쓰럽다. 그러다가 그 시간 덕분에 그는 글을 쓰고 내가 읽고 있으니 계속 잠들지 말라고 해야 하나 혼자 생각했다. 일기든 무엇이는 쓰는 시간, 시를 쓰는 과정과 마감, 직업이 시인이냐고 답하는데도 직업이 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나는 살짝 놀랐다. 우리 사회에서 시인은 하나의 직업으로 인식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건 시만 써서는 생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여하튼 그의 일기 가운데 나는 글에 대한 이야기가 제일 좋았다.


글을 쓰는 한 나는 세상의 순서를 망각하며,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들의 순위는 내 멋대로 재조정된다. 세상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글을 쓰는 동안 중요하지 않고, 세상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또한 글을 쓰는 동안에는 여전히 중요하지 않다. (260쪽)


그리고 이런 문장은 시리다. 가슴을 때린다. 밝고 천진난만하게 보이는 글의 이면에 그가 얼마나 아프게 살았는지 느낄 수 있다. 깊은 잠을 잘 때가 있는데 그건 우울증을 앓을 때라는 말도 자꾸 생각난다. 잠을 잘 때는 아플 때고 건강할 때는 잠을 못 자고 있으니.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는 시간이 길어지기를 바란다. 그 시간 아무것도 아닌 존재여도 상관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 나는 너무 사람이다. 그래서 종종 사람이 아닌 시간이 필요하다. 가끔은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나 자신을 응원하고 싶다. (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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