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생애 소설Q
조해진 지음 / 창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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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지쳐 아무것도 볼 수 없을 때, 여기만 벗어나면 괜찮아질 것 같은 마음이 요동칠 때, 다른 곳을 갈망한다. 누구나 살면서 느껴봤을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이곳만 아니면 상관없을 것 같은 어떤 절박함. 그곳에 누군가 아는 이가 있어 기댈 수 있다면 떠나는 일은 쉽다. 시징, 윤주, 미정도 그랬다. 업무라는 목적이 있었지만 시징에게 한국의 영등포는 연인 은철의 공간이었다. 방송작가를 그만둔 윤주가 우연하게 연락된 미정이 있는 제주도로 떠난 이유도, 미정이 제주로 이주를 결심한 건 보경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윤주는 영등포의 작은 원룸을 시징에게 빌려주고 제주로 떠난다. 미정이 머무는 공간 역시 누군가에게 빌린 공간이다. 자신의 공간을 내주고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는 건 잠시나마 타인의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홍콩에서 한국으로 온 시징도 그러했다. 2014년 은철에게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의 방을 내주었다. 처음엔 그게 사랑인 줄 몰랐다. 조해진의 『완벽한 생애』은 시징, 윤주, 미정의 공간인 홍콩, 영등포, 제주도를 교차하며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른 삶을 살았지만 한 공간을 공유하며 그들은 조금씩 서로를 생각하고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들을 털어놓는다.


시위 속에서 쓰러진 시징을 도와준 은철, 둘 사이의 만남과 사랑은 3개월 정도였지만 6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 시징은 영등포에서 은철의 흔적을 찾고자 한다. 윤주의 방에서 은철을 떠올리는 시징, 알 수 없는 끌림으로 시징에게 자신의 마음을 메모로 남긴 윤주. 윤주는 함께 일하던 이들에게 상처를 받고 일을 그만두었다. 안간힘을 쓰면서 살아온 지난 모든 시간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미정의 연락에 계획 없이 제주로 왔다.


인권법재단 간사로 일했던 미정은 지금은 제주에서 새 공항 반대 활동가로 일한다. 미정에게 어떤 신념이 있는 건 아니다. 제주로 미정을 부른 보경언니와 지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미정도 법조인의 꿈이 있었지만 모의재판에서 다른 사건으로 인해 꿈을 접었다. 국가 폭력에 대한 사건으로 상대가 베트남전을 예로 들면서 무너졌다. 미정의 아버지는 베트남 참전 군인이었다. 자신이 누군가 변호한다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그 시절에 대해 물을 수도 없었다. 진실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 끝을 확신할 수 없는 신념은 애초에 갖지 않아야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일까. 어째서 고민을 거듭하고 애쓰며 투신할수록 생애는 엉망이 되는지, 미정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85~86쪽)


“윤주야, 난 여기가 편하고 사실 갈 데도 없어. 그게……”

“그게 내 잘못인 거야?” (101쪽)


그게 내 잘못이냐는 미정의 질문은 윤주에게 화살처럼 박힌다. 아니 우리 모두에게 그렇다. 윤주가 잘못한 게 무엇일까.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고 더 나은 삶을 원했을 뿐인데 그게 잘못일까. 시장, 윤주, 미정의 삶을 통해 우리는 이웃과 사회의 모습을 목격한다. 시징을 통해 홍콩의 우산 혁명과 독립 시위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 윤주에게서 결혼, 아이, 미래를 포기하며 하루하루 견디는 이들을 보고 미정과 미정의 아버지는 베트남전의 상흔과 제주를 비롯한 여러 곳의 난 개발을 생각한다.


우리는 때로 타인의 공간을 통해 자신의 그것을 본다. 타인의 삶을 통해 나의 삶을 돌아본다. 그러나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삶들이 있다. 시징에는 윤철이 그랬고, 윤주에게는 연인 선우가 그랬고 미정에게는 아버지가 그랬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에게 상처가 될까 봐 진심을 내보여줄 수 없어서 얇은 막 같은 걸 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서야 서투른 화해를 하거나 이전보다 조금 더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을 갖는다. 은철의 공간이었을 영등포에서 제대로 이별하는 시징, 두렵지만 아버지에게 베트남 참전 이야기를 들은 미정, 멀리서 선우를 지켜보며 그를 이해할 것 같은 윤주.


부유하는 삶은 불완전해 보인다. 하지만 부유하고 떠돌면서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기도 하고 몰랐던 상처를 발견하기도 한다. 조해진 작가는 언제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의 삶의 고단함을 말한다. 혼자가 아닌 누군가 만나고 그들에게서 위로받는 생의 아름다움도 놓치지 않는다. 누군가 있어 떠날 수 있고 돌아올 수 있는 생의 여행이라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거라고.


내 좋은 친구는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라고, 이 행성에 잠시 머물다가 가는 손님일 뿐이라고요. 친구의 그 말을 상기할수록, 그가 나와 헤어진 뒤에야 다른 사람과의 정착을 결심한 걸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저 그의 생애에서는 필연적인 과정을 밟고 있는 것뿐이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요. 그것이 우리 각자의 여행이겠죠. 물론 필연적인 과정들을 통해 생애가 완벽해지는 건 아닐 것입니다. 완벽할 필요도 없을 테고요. (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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