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프픽션
조예은 외 지음 / 고블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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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가 아니라고 해서 반드시 B급은 아니다. 마이너가 메이저가 되고 메이저가 마이너가 되는 건 순간이니까. 그저 취향의 문제다. 그런 구분을 하는 게 오히려 촌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모든 책과 모든 예술은 나아가 모든 삶은 저마다 자신의 고유한 무언가가 있다. 5명의 작가의 단편을 만날 수 있는 『펄프픽션』에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이게 뭐야 싶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와, 정말 놀랍다 싶을 수도 있으니까. 장르문학의 신선함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당할 것 같기도 하고.


저마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5편의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단편은 최영희의 「시민 R」이다. 인공지능 청소로봇 알옛이 주인이자 사용자를 살해하고 법정에 선 장면으로 시작한다. 상상이 가는가? 청소로봇이 사람을 죽였다니.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다 먼 미래 그런 기능이 탑재된 인공지능 청소로봇이 나올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에 무서움이 몰려온다. 전쟁을 위한 군사로봇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알옛은 왜 사람을 죽였을까? 청소를 위한 로봇, 지시어와 명령어는 청소가 전부였다. 그러니까 알옛이 사람을 쓰레기로 보고 청소를 한 것이다. 그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 시대의 가장 핫한 인플루언서이자 자신을 개발한 기업의 오너 서른두 살의 강희원이었다. 알옛은 법정에서 강희원의 집에서 지낸 시간을 회상한다. 강희원이 원하는 루틴대로 청소를 하고 그의 명령을 따른다. 그런데 어느 날 강희원의 침실에서 피를 흘리는 여성을 발견한다. 강희원은 침실 청소 대신 서재 정리를 명령한다. 알옛은 서재에서 책을 정리하고 분류하면서 책을 읽고 숙지한다. 인공지능 알옛은 점점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인문학 책들을 읽으면서 주인이 벌인 일을 생각한다. 그리고 스스로 인간로봇이 알옛이 아닌 시민 R이 되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


한나 아렌트는 시민의 권리를 이야기했다. 결국 시민이란 타자가 처한 폭력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그 자신도 정치적 공동체의 보호를 받는 존재였다. 시민은… 근사해. R은 인간이 부러웠다. 그리고 비록 인간은 아니지만 오늘 여자가 겪은 일을 경찰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R은 시민이 아니어도 그 여자는 보호받아 마땅한 시민이니까. ( 「시민 R」, 240~241쪽)


타자가 처한 폭력을 외면하는 강희원은 인간쓰레기였다. 심지어 상습 가해자였다. 청소를 하는 게 마땅했고 강희원의 명령대로 탁탁 접었을 뿐이다. 시민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아, 정말 좋은 소설이다. 재미는 물론 인문학적 사유까지 안겨준다. 앞으로 우리는 다양한 곳에서 인공지능을 만나고 어쩌면 시민 R을 만날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알옛이 시민 R이 될 수 있었던 건 독서의 힘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서사인가?


그 외의 네 편도 무척 흥미롭다. 대학입시를 목표로 모인 기숙 학원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이야기 조예은의 「햄버거를 먹지 마세요」, 영국 뱀파이어를 죽일 수 있는 떡볶이를 만들어 달라는 황당한 제안을 받는 류연웅의 「떡볶이 세계와 본부」, 조직폭력배와 위장 결혼을 한 여자가 남편을 죽이고 시체를 저수지에 던지자 등장한 외계인과 이상한 대화를 나누는 홍지운의 「정직한 살인마」, 태극기 부대를 떠올리면서도 정작 기존의 이미지가 아닌 ‘태극’의 영험한 기운에 대해 말하는 이경희의 「서울 도시철도의 수호자들」은 유머와 동시에 우리 사회의 면면을 고발한다. 재밌게 읽으면서도 우리 사회의 자화상과 마주한 기분은 피할 수 없다.


영화나 드라마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장르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 이 한 권은 무엇보다 멋진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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