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 개정판 문학동네포에지 34
윤희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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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포에지로 윤희상 시인의 첫 시집 『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을 만났다. 문학동네포에지는 문학동네 구간 시집을 복간하는 프로젝트지만 문학동네의 시집만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를 향한 애정이 돋보이는 시리즈다. 22년 전에 나온 윤희상 시인의 첫 시집으로 새롭게 수정하지 않고 문학동네포에지로 그대로 만날 수 있다. 처음 그 느낌을 마주한다고 생각하니 묘하게 떨린다.


일상과 문학의 아름다운 조화. 이 시집은 그런 시집이 아닐까 싶다. 우리 주변의 삶과 그 안에서 시인이 느끼는 생각은 짧은 시가 되고 하나의 기록으로 남는다. 비가 오는 풍경 속 가족의 모습, 어린 딸에게 토마토를 보여주기 위해 화분에 토마토를 심는 과정은 고스란히 시가 된다. 어렵고 복잡하지 않아서 친근하다. 다음 시가 궁금하다. 시집의 첫 시는 이렇다. 우리의 현재 모습을 상징과 은유와 성찰로 보여준다고 할까.


끝이 보이지 않아, 걷고 있음에도 불안한 삶. 잠기는 걸 알면서도 그 길 위에서 끝내 멈추지 못하고 나간다. 22년 전의 시가 왜 이리 가슴이 아픈 걸까. 그건 아마도 현재의 우리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가 좋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아마도 22년 전에 만났다면 몰랐을지도 모를 기분이다.


멀리, 끝없는 길 위에 발이 잠긴다

이어서 종아리가 잠긴다 연이어

무릎과 허벅지가 잠긴다

새가 울면서부터 여자가 잠긴다

남자가 잠긴다

따라서 허리가 잠긴다

얼마쯤 후에

가슴과 목이 잠긴다

웃다가 웃다가 얼굴이 잠기고

또 얼마쯤 후에

머리가 잠긴다

또다시 얼마쯤 후에

멀리, 끝없는 길 위에

가장 권위적인 모자가 하나

유품인 듯,

잠기지 않고 놓여 있다 (「멀리, 끝없는 길 위에」, 전문)


유독 이 시집에서 끌리는 건 ‘길’이었다. 시인은 무엇이 두려웠던 것일까. 그가 걷는, 들어선 그 길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걸까. 우리가 흔히 속상할 때 내뱉는 ‘길이 없다’란 말을 생각한다. 더 좋은 길, 더 나은 길만 생각했기에 그렇다. 다시 돌아와 다시 걸을 생각은 하지 않기에. ‘길이 끝났다는 곳에서 되돌아오는 길은 가는 길과 전혀 다른 오는 길이다 ’란 구절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길을 만들고 길을 고치는 이는 누구인가. 나의 길에서는 나만이 그럴 수 있다. 그런 맥락으로 「길에서, 아들에게」는 경험으로 얻는 이야기가 된다. 먼저 길 위에 선 사람으로 자신이 지나온 길에서의 후회를 아들은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해진다.


길은 끝이 없다

그러니까, 길은 끝나지 않는다

내가 막다른 길에서 보았던,

길은 여기에서 끝났습니다라는 친절한 말은

틀린 말이다

길이 끝났다는 곳에서

되돌아오는 길은 가는 길과

전혀 다른 오는 길이다 (「길」, 전문)


처음도 끝도

길 위에 있으니,

처음도 끝도 길이다


길 위의 코스모스

길 위의 실비어

길 위의 맨드라미


그러니,

‘길을 놓치지 말 것’ (「길에서, 아들에게」 전문)


그런가 하면 이런 시는 내 마음을 들여다본 것만 같아 화들짝 놀란다. 어느 시절,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문장을 시간이 흐른 뒤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사라지는 일상. 어디 밑줄 그은 문장뿐일까. 내가 남긴 글, 편지도 그러하고 심지어는 사람에 대한 마음도 그렇지 않은가.


10여 년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다가 그때 내가

밑줄을 그어놓은 글을 우연히 본다

그런데, 내가 왜

그 글 밑에 줄을 그어놓았는지

모르겠다 (「세월도, 마음도 흐른다」, 전문)


또 이런 시는 마음이 아프다. 어느 순간 사라진 노점상들. 코로나 시대에는 더욱 힘겨운 시간을 견디고 있을 누군가. 다른 것들을 파는 모습을 통해 계절이 흐르는 풍경은 이제 과거의 것이 돼버린 걸까. 군고구마를 팔던 그는 무엇으로 봄을 알리려 할까.


어제까지 육교 밑에서

꽃을 팔고 있던 아저씨가

오늘은

육교 위에서

군고구마를 팔고 있다 (「겨울」, 전문)


봄을 생각하며 봄을 읽는다. 이제 곧 무거운 외투를 벗고 봄이라는 걸 실감하며 봄을 노래할 날도 멀지 않았으니까. 마스크를 벗겠다는 기대나 다짐은 할 수 없지만 기어코 봄이 오는 명징한 사실이 위로가 된다.


온다. 소리도 없이 온다. 나는 마루 한편에 앉아

있었다. 와서 무릎을 만지는 듯, 드러낸다. 때로는

힘센 소처럼 여기다가도 잠시 소홀하게 여기고

있을 때, 잠깐 머물다가 떠난다. 그림자도 없이

왔다가 떠나는 길 위에 솟아오르는 새벽들이

알리바이를 흐트러뜨린다. 새싹들이 오가는 길을

메우고 지워도, 어쩔 수 없다. (「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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